해외여행/'19 독일

프랑크푸르트(2019.8.26~28)- 뢰머 광장, 유로타워, 괴테 하우스

여름숲2 2020. 9. 22. 09:11

  '프랑크푸르트'의 공식 명칭은 '프랑크푸르트 암마인(Frankfurt Am Nain)'이다. 독일 중서부 헤센주에 위치한 경제 문화 도시이다. '프랑크푸르트 암마인'이란 '마인강이 있는 프랑크푸르트(프랑크 족의 통로)' 라는 뜻이다. 프랑크 족이 알레만니족을 남쪽으로 몰아냈던 500년 경에 생겨난 이름으로 추정된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이 있어 유럽 여행의 관문 같은 구실을 하는 '프랑크푸르트'는  '괴테'의 도시로도 알려져 있지만, 사실 우리에겐 축구 선수 '차범근'의 도시로 잘 알려져 있다. '차범근'은 1978~1989년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프로 축구 리그였던 분데스리가에 진출하여 소속팀을 2번이나 UFFA컵 우승으로 이끌었으며, 시즌 베스트에 2번 선정, 10여년 동안 통산 98골로 전설을 만든 선수이다. 1980년 5월, 군부 구테타로 깊은 절망과 무력감에 빠졌던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그가 뢰머 광장에 있는 시청 테라스에서 손을 흔들었던 그 유명한 광경은 전설이 되고 자긍심이 되었다. 프랑크푸르트에서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오직 실력만으로 세계 최고의 축구리그에서 우뚝 선 그를 기억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뢰머 광장

 로마군이 주둔했던 곳이라 붙은 명칭인데, 공식 명칭은 '뢰머베르크 광장(Römerberg)'이다.  광장에는 '시청사'가 있고, 광장 중앙에는 정의의 분수(Justitia-Brunnen)가 있다.  광장 시청사의 맞은편에 위치한 비슷비슷한 건물들이 일렬로 서 있는데, 이런 건물을 '  오스트차일레(Ostzeile)'라고 부른다. 15세기 상인들이 지은 하프팀버(Half-Timber) 양식의 건물들이라고 한다. 또다른 한쪽에는 쉬른 미술관(Shirn Kunsthalle)이 있다.

 

시청사.  사진 왼쪽 3개의 동으로 연결된 건물이 시청사이다.  1405년 귀족의 저택을 사서 시청사로 사용했었다고 한다. 앞에 3개이 깃발이 있는데, 가운데가 독일 국기이고, 왼쪽이 유럽 연방기, 오른쪽이 헤센주기 라고 한다.   이 시청사 중앙 건물 베란다에서 수많은 프랑크푸르트 시민들이 운집한 가운데 차범근 선수가 서서 승리의 인사를 했었다. 
차범근 선수가 시청 앞 테라스에 서서 우승컵을 들었던 사진. < 출처 : SBS 브라질 2014 특집 다큐 동영상 중 자료 사진>
오스트차일레.  일렬로 늘어선 목조 건물을 가리켜 '오스트차일레'라고 부른다고 한다.  시청사와 함께 뢰머 광장의 상징이다.  15세기에 상인들이 지은 건물이라고 하는데, 뽀쪽한 지붕이 일렬로 늘어선 목조 건물이 참 아름답다.  이런 양식의 건물을 하프팀버(Half-Timber) 양식이라 한다.   앞에 있는 동상은 정의의 여신인 '유스티아 동상'이다. 1543년 제작되었는데, 오른 손엔 정의를 상징하는 칼을, 왼손에 공정한 심판을 상징하는 저울을 들고 있으며, 눈은 공무원이 올바른 공무집행을 하는지 보려고 시청을 바라보고 있다고 한다.                                                                             * 하프팀버 - 북유럽과 영국에서 볼 수 있는 목조 건물 건축 양식. 기둥, 들보, 사재 등 골조 부분은 목재로 짓고, 그 중간 부분은 벽돌, 석재, 흙 등을 채워 메워서 벽체로 삼는다.

 

◈ 유로 타워 Euro Tower

  유럽 중앙 은행이 위치하고 있는 유로타워는 높이 148m로 40층 규모의 빌딩이다. 1971~1977년까지 Richard Heil의 디자인으로 지어졌다. 건물 앞의 유로 상징물이 유명하다.

 

1977년 지어진 148M 의 EU의 중앙은행인 유로타워(Euro Tower).

 

 

◐ 괴테 하우스 Goethe Haus & Museum

 

이탈리아 여행 중의 괴테,《캄파냐 로마나에 있는 괴테》, 티슈바인(Johann Heinrich Wilhelm Tischbein) 1787년 작

 괴테는 1749년 8월 28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태어났다. 왕실 고문관인 아버지 요한 카스파르 괴테와 프랑크푸르트암마인 시장의 딸인 어머니 카타리네 엘리자베트 텍스토르 사이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그리스어, 라틴어, 히브리어, 불어, 영어, 이탈리아어 등을 배웠고, 그리스 로마의 고전 문학과 성경을 읽었다. 그는 북독일계 아버지에게서 '체격과 근면한 생활 태도', 남독일계 어머니에게서 예술 사랑과 '이야기 짓는 흥미'를 이어받았다. 어린 나이에 신년시를 써서 조부모에게 선물할 정도로 문학적 재능을 타고났다.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고, 1767년에 첫 희곡 ‘연인의 변덕’을 썼다. 1770년 슈트라스부르크( 스트라스부르 ) 대학 재학 당시 호메로스 , 오시안 , 셰익스피어의 위대함에 눈을 떴으며, ‘ 질풍노도 운동 (Sturm und Drang)’의 계기를 마련했다. 그는 법률 사무소 견습생일 때 약혼자 있는 샤를로테 부프와 사랑에 빠지는데, 이때 체험을 소설로 옮긴 게 [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1774)이다. 그는 1775년 바이마르로 이주했으며, 이 도시를 문화의 중심지로 끌어올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 했다. 행정가로 국정에 참여해 다양한 성과를 거두었고, 식물학, 해부학, 광물학, 지질학, 색채론 등 인간을 설명하는 모든 분야에 관심을 기울였다. 1786년 이탈리아 여행에서 고전주의 문학관을 확립했고, 1794년 실러를 만나 함께 독일 바이마르 고전주의를 꽃피웠다. 1796년에 대표적인 교양소설 [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를 썼다. 1805년 실러의 죽음으로 큰 충격에 빠지지만, 이후 창작 활동과 연구는 끊임이 없었고, [ 색채론 ](1810), [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 ](1821), [ 이탈리아 기행 』(1829) 등 완성했다. 스물네 살 구상하기 시작하여 생을 마감하기 바로 한 해 전에 완성한 역작 [ 파우스트 ]를 마지막으로 1832년 세상을 떠났다.

                                                * 위키 백과

  괴테가 태어나던 1749년 8월 28일 12시에 정오의 종소리가 들렸다는데, 마침 우리가 갔었던 때도 그 시간이어서 12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마치 시간을 거꾸로 돌려서 대가가 태어나는 순간으로 들어가는 듯 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외로운 사춘기 소녀였던 나는 어느 따스한 일요일, 그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손에 들었고, 첫 페이지를 읽은 순간부터 끝페이지까지 단숨에 읽었고, 읽는 내내 울고 있었다. 엉엉 울면서 이 소설을 다 읽었던 때의 먹먹한 마음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데, 그때도 그 울음이 베르테르의 이루지 못한 사랑 때문이 아니라 나의 존재의 외로움 때문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었다. 이 소설이 촉발한 나의 외로움과 비극적 세계관이 나를 문학의 세계로 이끌었고, 세상을 버티는 힘이 되었다. 그 괴테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바로 이 집에서 집필했다고 한다.

 이 4층짜리 건물에서 괴테(Goethe)가 태어났고, 이 집에서 집필했다고 하는데, 2차 대전 중에 폭격되었던 것을 복구하였다고 한다. 그가 살던 집을 복원한 생가(Haus)와 그의 유품이 전시된 박물관(Museum)으로 나뉘어져 있다.

독일의 위대한 문학가 '괴테'가 태어나서 살던 집을 복원하여 생가와 박물관으로 꾸민 건물이다. 4층짜리의 이 건물은 괴테가 살던 생전 그대로의 모습이라고 한다.  
입구. 가끔 위대한 인물이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서 부유하게 살았던 것을 보면, 당황스럽다. 일종의 편견인데, 위대한 인물은 시련을 겪는 통과 의례를 거혀야 하는데, 그것이 꼭 불우한 어린 시절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똑같은 예로 위대한 인물의 부도덕한 행위가 드러날 때도 몹시 당황하는데, 인간의 삶을 돌이켜 보면, 삶이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좀 나이가 들면서는 한 인간의 삶을 평가할 때는 당대의 관습을 고려하고, 그의 전 인생을 통해 그가 관철하고자 했던 것을 평가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당대에도 상류계층 중에서도 최고층이었을 '괴테'가 그의 출신성분의 특권에 매몰되지 않고, 전 계층의 삶을 들여다보며 인간성에 대해 깊은 통찰을 멈추지 않는 지성의 태도를 견지했다는 점이 그를 위대하게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글씨
여인과 남성의 역할에 대한 그림이 있는 방
그의 집에 걸려 있었던 재미있는 그림이다. 여성의 역할과 남성의 역할을 나눠 그렸는데, 오늘 날의 관점에서 보면 많은 비판을 받았을 것 같다. 여성들은 바느질하고 집안 일을 하고 아이들을 돌보고....
남성들은 공부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쓰고.....
화려한 집

이 책상에서 그가 글을 썼다는데, 그는 여기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썼을까?
아름다운 여인과 아름다운 벽지가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그의 누이가 서 있는 듯하다.
다락으로 올라가는 계단인데, 사실 이 다락이 괴테가 가장 좋아하는 집필 장소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