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뉘른베르트 2 (2019.8.20.화) - 카이저부르크,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 기념관

여름숲2 2020. 9. 8. 01:58

♥ 카이저부르크 성( Kaiserburg Nurnberg)

뉘른베르크의 상징인 뉘른베르크 성은 1040년 오각형의 탑인 퓐프에크투름이 먼저 건축된 후 16세기가 되어서야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되었다. 지금은 카이저부르크(황제의 성)와 부르크그라벤부르크(영주의 성) 2개의 성으로 나뉘어 있는데, 원래는 슈타트부르크(도시의 성)까지 3개의 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카이저부르크는 제2차 세계 대전 때 폭격으로 심하게 무너졌지만 1950년에 옛 모습 그대로 복원했다. 성 내부는 황제의 방과 예배당이 볼 만하고, 언덕 위에 지어진 성이어서 우물의 깊이가 60m에 달하며 우물의 깊이를 직접 느껴 볼 수 있는 가이드 투어를 할 수 있다. 둥근 모양의 감시탑은 뉘른베르크에서 가장 높은 곳이어서 이곳에서 뉘른베르크의 모습을 한눈에 담을 수 있으며, 예전에 왕실 외양간으로 사용하던 건물은 현재 공식 유스 호스텔로 리모델링하여 사용하고 있다.
                               * 다음 백과 'Enjoy 유럽'

 우리의 숙소는 '카이저부르크' 성을 개조하여 만든 '유스호스텔'이었는데,  중세에 이곳은 성의 외양간이었다고 한다. 외양간이라 했을지라도 방의 창을 열면 뉘른 베르크 시내가 한 눈에 펼쳐지고, 눈을 돌리면 고성이 눈에 들어오는 멋진 숙소였다. 구시가의 가장 높은 곳에서 성에 초대된 손님처럼 우리는 하룻밤을 잤다. 다음 날 아침, 오래된 철문을 나서 담을 끼고 돌았더니, 바로 카이저부르크 성이었다. 하룻동안 눈에 익힌 풍경 속으로 들어가노라니, 어느덧 중세의 성 안으로 시간을 거슬러 들어서는 느낌이 들었다. 이 성은 '백조의 성' 같은 탐미적 열정이 만들어낸 성이 아니라, 방어와 공격에 유리한 실용적 목적으로 지어졌기에 성이라기 보다는 요새에 가깝다. 자연이 만든 높은 벽과 자연스럽게 뒷쪽에서 감싸고 도는 해자가 범접하기 힘든 권위를 갖고 있다. 

  카이저Kaiser는 '황제'라는 뜻이고 '부르크burg'는 '도시'라는 뜻이니, 이 '카이저부르크 성'은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성인 셈이다. 12세기에 건축된 카이저부르크는 수백 년 동안 왕관, 왕홀(왕권의 상징으로 손에 드는 봉), 보주(구슬) 등 신성로마제국의 보물들을 보관하는 장소였다고 한다. 

 이 성의 정원 한 가운데에는 우물(Deep Well)이 있다. 무려 깊이가 48m나 되는 이 우물이 이 성의 유일한 식수원이었다고 한다. 적들의 침입을 막기에 유리한 언덕위에 세워진 성은 물을 구하기에는 어려웠기에 땅 속 깊이 우물을 팔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니, 실제 전쟁 중 봉쇄되었다면 어떻게 될까 상상해 보게 된다. 이 우물과 진벨탑은 별도로 입장권을 구매해야 된다.

 

유스호스텔 Luginsland Tower
유스호스텔의 육중한 출입문

뉘른 베르크의 오래된 건물들은 한결같이 지붕이 높고 지붕에 계단식 창을 가지고 있다. 두꺼운 벽과 작은 창문을 보안하기 위해서 지붕에 창을 만듦으로써 채광과 환기를 한꺼번에 해결하려고 한 듯하다. 이런 실용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진 창이지만, 왠지 비오는 날이나 별이 밝은 날을 기다리고 싶게 만드는 낭만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지금은 유스호스텔로 쓰이고 있는 이 건물은 성에서 가장 나중에 지어진 건물로 1층은 마굿간, 2층 위부터는 곡물 창고로 쓰였던 것으로 위키토피아 설명에 나오는데 사실 여부는 잘 모르겠다.  뉘른베르크 곡물 창고의 벽에 계단식으로 창을 내서 자연 환기를 했던 예로 봤을 때, 곡물 창고였다는 것이 맞을 것 같다.

 

Nuremberg Castle: Palas, Imperial Chapel, Heathens' Tower on the left - Sinwell Tower in the middle left - Pentagonal Tower, Imperial Stables and Luginsland Tower on the right

* 위 사진은 전체 개념도를 위해 위키피디아 Wikipedia에서 가져왔습니다.

맨 오른쪽 건물이 유스호스텔이다. 그리고 이 건물이 슈타트부르크(도시의 성)이고, 유스호스텔 건물 오른쪽 탑이 Luginsland Tower이다.

 

유스호스텔을 제외한 전체적인  성의 모습.   * 위 사진은 전체 개념도를 위해 위키피디아 Wikipedia에서 가져왔습니다.

 

진벨탑( Sinwell Tower).   13세기 지어진 이 탑은 세계 2차 대전의 폭격에서 살아남은 탑이다. 
이교도 탑 (Heidenturm)
성문을 들어서면 바로 이교도탑이 나온다.
황제의 예배당
황제의 예배당 아치문 위에 있는 문자. 신성로마제국의 상징인 쌍두 독수리다. 

성 안에서 본 창밖 풍경

 

예배당 
중세의 기사는 장검과 방패, 그리고 단검을 가지고 다녔음을 알 수 있다.
왕관 등이 전시되어 있다.
중세의 공격 무기들과 실제 사용 용례들
중세에는 단검이 보편적인 패션 악세사리로 남성 복장의 일부였다고 한다.

 

박물관 등을 관람하고 동쪽 끝으로 계속 가면 한적하고 아름다운 정원이 나오는데 전망이 아름답다. 

 

 

♣ 뉘른 베르크 전범 재판 기념관Nuremberg Trials Courtroom

 승리를 거둔 연합군 세력은 나치의 주요 우두머리들이 스스로 저지른 죄에 대해 재판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에 동의했다. 재판 장소로는 뉘른베르크에 있는 사법 궁전이 선정되었는데, 큰 이유는 이곳의 법정과 부속된 감옥이 연합군 폭격 피해를 입지 않고 남아 있는 몇 안되는 적당한 장소 중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헤르만 괴링, 루돌프 헤스, 카를 되나츠,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등을 포함해 총 22명의 나치 수장들이 확장한 '코트 룸 600'에서 재판을 받았다. (다른 피고들도 이후 벌어진 뉘른베르크 후속 재판에서 재판을 받았다)
 주요 전범 재판은 1945년 11월부터 1946년 10월에 걸쳐 지속되었으며, 피고들에게 평화와 인류에 위배되는 범죄를 저질렀다는 죄목이 부과되었다. 재판 절차 전체가 엄청난 일이었다. 법정에서 취한 증거는 마흔 두 권의 두꺼운 책이 되기에 충분할 정도였다. 평결이 내려졌을 때 열두 명의 피고에게는 사형 선고가 내려졌고, 세 명은 종신형, 네 명은 10~20년까지의 형기를 받았으며, 세 명은 무죄 선고를 받았다. 괴링은 교수형 판결을 받았지만, 처형 전에 독약을 삼키고 자살했다.  20세기의 가장 극악한 이들 중 몇몇에게 응당한 처분을 내렸다는 의미 외에도 뉘른베르크 재판은 중요한 선례를 세웠다. 역사상 처음으로 국제 법정이 국제적인 형법에 위배되는 범죄에 대해 평결을 내린 것이다. 이는 오늘날 중죄인들을 헤이그에 회부하게 하는, 국제 사법 재판의 발전을 위한 최초의 움직임이었다. 최근의 예로는 전 세르비아와 유고슬라비아 대통령 '밀로셰비치'를 들 수 있다.
  재판이 끝나자 '코트룸 600'은 원래 크키대로 돌아갔으며, 여전히 뉘른베르크 법정으로 쓰이고 있다.
                                     *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세계 역사 유적 (마로니에 북)

 

 뉘른베르크는 아름다운 중세의 도시이기도 하지만, '히틀러' 가 자신의 본거지로 삼았던 도시이다. 그러기에 이 도시에서 전범 재판이 열린 것은 마치 '인과 응보'의 법칙처럼 자연스럽기도 하다.  실제 재판이 열렸던 600호 법정은 당시 모습 그대로이며, 지금도 재판이 열리는 곳이라고 한다.  4층 구조의 건물인데, 2층에 '코트 룸 600호' 법정이 있고, 3층은 전시실이다.  전시실에서는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 당시의 배경, 진행과정, 영향 등을 사진, 영화, 녹음 테이프 등을 통해 상세하게 전달하고 있다. 어느 자리에 전범이 앉았는지, 어떤 동선으로 들어오고 나갔는지, 판사는 어느 자리에 앉았는지 정말 세세한 것까지 다 설명되어 있다. 그래서 독일인들이 이 역사적 사실을 잊지 않도록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Courtroom 600
많은 사람들이 정말 진지하게 설명을 듣고 있다. 너무 전문적인 용어들이 많아 이해하기 힘들다.ㅠㅠ
'헤르만 괴링'을 비롯한 전범들 
전시관 
헤르만 괴링
기념관 뒤쪽, 본래 감옥이 있던 건물이라 크기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