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19 스위스

취리히(2019.8.17. 토)

여름숲2 2020. 8. 30. 17:32
취리히는 스위스 제1의 도시이자 세계적인 상업과 금융의 중심지이다. 흔히들 취리히가 스위스의 수도라고 알고 있지만 스위스의 수도는 취리히가 아닌 베른이다.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등과 연결되는 철도가 발착하는 곳이며, 스위스에서 가장 큰 국제 공항인 취리히 클로텐 국제 공항이 자리하고 있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다. 16세기 초 츠빙글리에 의한 종교 개혁이 이뤄졌으며, 켈러와 페스탈로치 같은 작가와 학자를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또한 취리히는 아름다운 취리히 호와 리마트 강이 자아내는 목가적 풍경과 대도시의 현대적 느낌, 구시가지의 중세풍 건물들이 연출하는 고풍스러움을 두루 갖춘 유럽 굴지의 관광 도시로서도 알려져 있다.
                                                               * Enjoy 유럽

 여행의 마지막 날이다. 이제 돌아갈 친구들은 돌아가고, 나는 몇몇 친구들과 남아서 독일 여행을 계속할 것이다. 

여행의 마지막 날은 늘 그렇듯이 알 수없는 피로에 신발 신기도 귀찮아진다. 바로 우리가 그랬다. 그래서 취리히 시내 관광은 거의 시늉만 했다. 사진 찍을 생각도, 성당 안에 들어가 볼 생각도 않는 우리 모습이 사진에 그대로 드러난 것 같다.  

 

이 뮌스터 다리를 사이에 두고 앞에 보이는 곳에 그로스뮌스터, 보이지 않는 쪽에 프라우뮌스터가 있다. 오른쪽 다리 중간에 있는 동상이 한스 발트만 기마상이다. 

 

그로스뮌스터 Grossmunster(대성당) 

16세기 스위스의 츠빙글리(Ulrich Zwingli)와 불링거(Heinrich Bullinger)가 이 성당에서  종교 개혁을 시작했다.  이 성당에 연결된 신학대학은 노벨상 수상자를 21명이나 배출할만큼 취리히 대학의 초기 원형이었다고 한다. 이 성당의 2개의 탑 중 남쪽 탑인 칼스투룸 탑 전망대에 오르면 취리히의 전경을 볼 수 있다.

 

프라우뮌스터 Fraumunster(성모교회)

853년 독일의 루이(Louis) 왕에 의해 세워졌는데, 로마네스트 양식의 성가대와 높은 아치형 내부 천장이 교회 건축이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이 성당에 꼭 가봐야 할 이유는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때문이다. 북쪽에 있는 9m나 되는 창은 아우구스토 자코메티가 1945년 제작한 창이다. 또, 성가대의 5개 창문(1970)과 남쪽의 장미창(1978)은 '마르크 샤걀 Marc Chagal)'의 작품이라 유명하다. 실내에서 사진 촬영이 금지 됐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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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적인 느낌을 보여주려고 구글에서 가져왔습니다. 왼쪽이 샤갈의 5개 창, 오른 쪽이 샤갈의 장미창입니다.

 

 

엽서 사진이라 성당 실내의 위치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샤갈의 느낌만은 물씬 난다.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를 볼 때마다 햇살에 따라 다른 느낌과 색채를 보여주는 스테인드그라스를 성당 창에 만들 생각을 한 천재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예언자 엘리야의 승천, 야곱의 싸움과 천국의 꿈, 예수의 생애, 세상의 끝날 트럼펫을 부는 천사, 백성들의 고통을 내려다보는 모세와 계명 순서라고 한다.

 

한스 발트만 Hans Waldmann  기마상

 15세기 군인이며 정치가(취리히 시장)였던 인물로 취리히 경제발전에 공헌한 인물이라지만, 독재자여서 결국 처형당했다는데, 동상으로 세워둔 걸 보면 평가가 다른가 보다. 한 인물의 삶에서 공과 과를 정확하게 재서 더 기운 쪽으로 인물을 평가한다는 것이 합리적인 사고인 것인지, 엄격한 도덕적 기준으로 평가하여 인물의 공을 덮는 것이 정당한 평가인지, 공이라는 것이 결국 어느 한 쪽의 이익과 관련된 것일 수밖에 없는데 객관성은 어떻게 담보하는지 하는 복잡 미묘한 생각에 빠지게 한다. 다만,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결함은 결함대로 인정하고, 한 인물의 전 생애를 통해 관통하고자 했던 삶의 철학과 성과를 따져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스 발트만 Hans Waldmann

한때 취리히 시장직에 있으면서 사실상의 독재자로 군림했다. 유럽의 반수 가까이나 되는 국가에 용병을 공급하며 부를 축적해 스위스 연방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인물이 되었다.

1476년 6월 22일 취리히 분견대와 함께 모라에서 부르고뉴 공작 샤를을 물리쳤고 1481년 12월 22일 주(州)의 분쟁을 방지하기 위한 슈탄스 협정에도 참여했다.

1483년 취리히 시장에 선출된 그는 곧 전통적으로 귀족세력이 장악해 오던 정부구조를 해체하고 입헌주의의 기반을 확대했다. 스위스 용병을 공급해(이에 대한 보상으로 사보이·뷔르템베르크·헝가리의 군주로부터 은급을 받았음) 부와 국제적 영향력을 얻은 그는 취리히에서 거의 절대적인 지배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자신의 세력을 다른 주로 확대하려는 시도는 저항에 부딪혔으며 계속 이를 지나치게 고집하자 취리히에서의 지지마저 잃게 되었다.

과정의 합법성은 의문시되지만 결국 취리히 시민들로 구성된 한 분파에 의해 체포당해 처형되었다.
                                                * 다음 백과

취리히의 거리에서 남은 시간들은 쇼핑을 했다. 나는 독일로 가야하기에 아무것도 사지 않았지만, 유명한 명품거리인 반호프 거리를 어슬렁대는 것만으로도 몸과 마음이 가벼웠다. 관광객으로 다닌다는 것은 거리, 혹은 역사에 거리를 두는 일이므로.

야듀~ 스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