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연암을 읽는다

여름숲2 2020. 8. 7. 21:13

연암을 읽는다

저자 : 박희병

출판 : 돌베개

발행 : 2006.4.5

 

   박지원은 우리 역사상 가장 뛰어난 문장가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등학교 때 그의 한문소설 '양반전'과 '허생전'을 배웠을 것이다. 조금 더 기억해보면, '열하일기'에 나오는 '일야구도하기'를 머리 싸매고 읽었던 기억도 있을 것이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한문 소설의 대가. 중국 사신 일행으로 따라갔다가 쓴 기행문 '열하일기' ' 등이 우리가 기억하는 연암이다. 조금 관심을 두었다면, 그의 실체는 그의 도도한 한문 문장에 있다는 말도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문장이 한문으로 쓰여졌기에 읽을 수 없었고, 설사 번역된 글이 있어도 당대의 문화와 사유 방식을 이해할 수 없었기에 난해하기만 했다.

   '열하일기'에 도전해 보고 싶었으나, 엄두가 나지 않던 터에 오랫동안 연암을 연구해온 박희병 교수의 해박한 고전에 대한 지식과 역사적 실증에 바탕을 둔 연암의 글과 해석을 만나게 되었다. 그의 설명과 주석에 접하고서야 연암 글의 놀라운 전개와 생생한 비유, 심오한 사유가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비로소 연암에게 한 발자국 접근하게 된 셈이다.

이 책에는 연암의 많은 글 중에서 저자가 선택한 20편의 연암 산문을 번역하여 제시하고, 글에 인용되는 중국의 역사적 인물들과 고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씨줄로, 연암과 연암 주변의 인물들이 처했던 당시 상황과 고민을 날줄로 엮어 연암 산문을 읽어내고 있다. 그리하여 비로소 도도한 사유와 통찰의 연암 산문이 제 모습을 하고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 연암 박지원(1737~1805)

- 1737년 : 한양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인 박필균은 당시 노론의 대가였다. 본관은 반남(潘南, 전라도 나주시 반남면), 는 미중(美仲) 또는 중미(仲美), 는 연암(燕巖)

- 1759년 : 23세 때 모친이 돌아가셨고, 이듬해에 집안의 기둥이었던 조부 박필균(1685~1760)이 돌아가셨고 31세에 부친이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벼슬을 하지 않았고, 할아버지가 고관대작을 지냈으나, 청빈하여 곤궁한 생활을 하였다.

10대 중반에 '사기' 열전을 공부하면서 사마천의 글쓰기와 인간학에 심취했다. 중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문장가인 사마천과 장자에게 영향을 받았다.

- 1765년 : 29세. 유공 언호와 신공 광온이 나란히 말을 타고 금강산 유람을 떠나자고 연암에게 청했으나, 어른들을 모셔야한다고 거절했다. 그 말을 들은 할아버지가 '명산에는 인연이 있는 법이거늘, 젊을 적에 한번 유람하는게 좋으니라' 라고 하셨다. 하지만 노자가 없었다. 이 말을 들은 김공 이중이 나귀 살돈 100냥을 보내주었다. 데려갈 하인이 없이 어린 여종을 시켜 골목에 나가 '금강산 따라갈 사람 없나요?' 라고 외치게 했다. 그렇게 구한 하인과 뒤늦게 출발하여 다락원에서 친구들을 만나 금강산을 유람하였다. 이때 마하연 백화암에서 준대사를 만났고 많은 것을 깨우치게 된다.

- 1768~1771년 : 서울 백탑 주변에 살았음.

- 1771년(영조47) : 연암 35세. 친구 '이희천'의 죽음을 겪으며, 과거를 포기한 후 송도와 평양을 유람하며 천마산과 묘향산에 올랐으며, 남쪽으로는 속리산, 가야산, 화양동, 단양 등지를 유람하였다. 생활이 곤궁하여 처가인 경기도 광주로 가족들을 보내고 자신은 전의 감동(서울 종로구 견지동)에서 세를 얻어 살았다.

1771년 문생뻘인 백동수(1743~1816)와 함게 연암골을 답사한 후 이곳에 은거하기로 마음 먹고,이곳에 연암 산방을 마련하여 수시로 거처하였다. 연암협은 황해도 금천군에 있으며, 개성에서 30리 떨어진 산골짝이었다. '연암'이라는 지명은 '제비 바위'라는 뜻이고, 그의 호 '연암'은 이 지명에서 취한 것이다. 42세 때인 1778년에는 자신을 박해하려던 홍국영을 피해 가족을 이끌고 이주하였다. 1780년 홍국영이 축출되자, 다시 서울로 돌아왔으며, 그후 서울과 연암협을 들락날락 하였다.

- 1772년 : 전의감동에서 살았는데, 자신이 살던집에 '방경각', '영대정'이란 이름을 지었다. 이 시절에 이전부터 써 놓았던 '전' 들을 모아 '방경각 외전'이라는 책을 엮었는데, 여기에 '양반전' 등 9전이 수록되어 있다. 또, '영대정 잉묵'이라는 책을 엮었는데, '잉묵'이란 하잘 것 없는 편지글이라는 뜻이다.

- 1780년 : 중국 외교사절단의 정사로 임명된 삼종형 박명원의 수행원으로 중국 여행길에 올랐다. 5월에 연행을 떠나 같은 해 10월에 귀국한 후 연압협과 서울을 오가며 '열하일기 '저술

- 1786년 : 음공으로 선공감 감역이라는 말단 벼슬을 얻어 하게 된다.

- 1786년 : 아내가 51세로 세상을 떴다. 이후 연암은 첩을 두지도 재혼하지도 않고 혼자 산다. 연암은 아내를 존경했으며, 아내가 죽자 애도하는 시 20수를 지었다.

- 1791년 : 안의 현감에 임명, 지금의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일대인데, 이 시기가 가장 평온했던 시기였던듯하다. 친구들을 불러 평안하게 즐기고 대접했다는 기록이 있다.

- 1803~1805년 : 1803년 중풍으로 몸이 마비되어 글을 쓰지 못하다가. 1805년 사망하였다.

-1826년 : 아들 박종채가 아버지의 언행을 기록한 '과정록'을 출간하였다. 그러나 아버지 연암의 글은 너무 당대의 사고와 달라서 전집은 출간하지 못했다고 한다. 정승까지 지낸 손자인 박규수도 차마 출간은 못했다. 결국 1900년에야 초록 형태로 출간되었다고 함.

 

 

★ 연암의 친구들

- 이희천(1738~1771) : 한산 이씨 명문가 출신의 저명한 고사 이윤영의 아들이다. 연암이 이윤영에게 '주역'을 수학한 것이 계기가 되어 1756년 이래 친밀한 교유를 맺어왔다. 이윤영은 당시 영조가 주도한 탕평책이 현실적으로 아첨꾼 및 척신을 낳으면서 선비의 기풍을 타락시키고 있다는 노론의 비타협적인 입장을 견지한 인물이다. 이런 인물을 '노론 청류'라 부른다. 연암의 장인도 '노론청류'였고, 연암 집안 역시 그 입장이었다. 그런데, 이희천이 '명기집략'이라는 중국 책을 소지하고 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1771년 5월 26일 효수되었다. 이 책 내용 중에 조선 왕실을 욕되게 하는 말이 일부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책의 원래 소장자는 영조의 부마 박명원이었고, 이희천은 빌려 갖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그런데도 사형까지 시킨 것은 평소 밉게 보던 '노론 청류'를 견제하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진 가혹한 응징이었다. . 이 사건을 통해 연암은 당시 정치 현실에 환멸을 느끼고 과거를 완전히 포기하게 된다.

 

- 이서구(1754~1825) : 당호는 '소완정', 자는 '낙서', 호는 '강산'. 어린시절 10대 때부터 연암에게 수학했으며, 뒷날 우의정을 지냈다. 재주가 몹시 빼어난 데다 침착하고 조용했으며 식견과 도량이 있어 연암이 매우 사랑했다고 한다. 이 책에 나오는 ''여름밤에 벗을 방문하고 와'에 답한 글'의 주인공이다.선생뻘이지만 넓은 의미에선 서로 다 '벗'이라고 생각했던 연암 그룹의 사고방식이 담겨 있다.

또, 연암은 이서구에게 독서의 방법을 설파한 '소완정 기문'을 써주는데, 이 책에 실려 있다.

 

- 백동수(1743~1816): 서얼 출신의 무반으로 이덕무의 처남이다. 무예가 출중하였으나 한미한 신분 때문에 몹시 불우하였다. 훗날 그는 무직인 장용영 장교를 거쳐 박천 군수를 지냈다. 정조 때 왕명으로 편찬된 '무예도보통지'는 그와 이덕무, 박제가가 힘을 합쳐 만든 조선의 무예를 집대성해 놓은 책이다. 영숙은 그의 자다. 1771년 무과에 급제했고, 1773년 기린협으로 들어가 직접 농사짓고 목축을 하다가 1780년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1788년 장용영 초관에 임명되었으면, 1789년 '무예도보통지'를 간행하는 일을 맡았다. 1791년에 충청도 비인 현감. 1802년에 쳥안도 박천 군수에 임명되었다. 이 책에 가난을 견디지 못하고 화전을 하려 산골에 들어가는 백동수에게 주는 글인 '기린협으로 들어가는 백영숙에게 주는 서'가 있다.

 

- 홍대용(1753~1787) : 담헌은 그의 당호다. 1772년 부터 연암그룹은 홍대용의 남산 집에서 자주 모임을 가졌다. 그는 연암보다 여섯 살 위로 박지원과 함께 북학파의 리더였다. 박지원이 문학을 통해 새로운 사유와 미학을 모색했다면, 홍대용은 경학과 자연과학을 통해 인간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수립해 갔다. 연암의 가장 가까운 벗이자 가장 존경한 벗이 바로 홍대용이었다. 연암이 키가 크고 거구이고 소탈한 성격의 소유자였음에 반해 홍대용은 몸이 호리호리하고 성격이 단아했다. 연암이 말술을 불사했음에 반해 담헌은 술을 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두사람은 서로를 존중해 처음 만난 이래 끝까지 공경하는 태도를 잃은 적이 없었다고 한다.

홍대용은 음악에도 깊은 조예가 있어 거문고를 잘 연주했고, 자주 '유춘오 악회'라는 음악회 모임을 가졌다.

그는 1765년 중국 연행 사절의 일원으로 북경에 갔었는데, 북경 유리창에서 항주의 세 선비 엄성, 반정균,육비를 알게 되어 서로 필담을 나누며 교유했다. 귀국 후 십 수년에 걸쳐 이들 중국인 친구들과 편지를 주고 받으며 교유를 나눴다. 홍대용은 자기보다 한살 아래인 엄성과 특히 가까웠다. 엄성은 훗날 병으로 위독할 때 홍대용이 선물로 보내 준 조선산 먹을 꺼내어 그 향기를 맡다가 가슴에 올려 놓은 채 운명하였다. 그래서 가족들이 그 먹을 관에다 넣어 주었다고 한다. 그때의 경험을 '담헌서' '회우록'이라는 책에 기록하었다. 이 일은 후에 조선 문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어 중국에 가면 중국사람들과 친교를 맺으려고 노력하게 하였다. 이 책에 연암이 쓴 '홍덕보 묘지명'에 그 내용이 실려있다.

 

-정철조(1730~1781) : 호는 석치. 소북 집안으로 공조 판서를 지낸 정운유의 아들이다. 1774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지평과 정언을 지냈다. 영 정조 때의 뛰어난 자연과학자의 한 사람이다. 그림에도 뛰어나 정조의 초상화 제작에 관여한 적이 있다. 벼루 제작에 조예가 깊어 '석치(연석, 즉, 벼룻돌에 미친 바보라는 뜻)라고 자호하였다. 홍대용과 김원행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사이로, 홍대용을 통해 연암을 알게 된다. 1772년 무렵 연암이 가장 가까이 했던 인물이 '홍대용, 정철조, 이서구,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이다. 앞의 3명은 문벌있는 양반이고, 뒤의 3명은 서얼이다. 이중 연암과 동급의 친구는 홍대용과 정철조이고, 나머지는 문생에 가깝다.

정철조는 평생 천문학과 지리학에 전념하면서 천문 관측 기구를 직접 제작하기도 하고 지도을 만들기도 하는 등 학자로서의 삶을 살았지만, 술을 좋아고고 주량이 크기로 유명해서 연암과 기질적으로 잘 통하는 벗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열하일기에 북경 지도를 그려준 것도 그다. 그런 그가 1781년 갑자기 세상을 떴다. 연암의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책에 그 제문 '정석치 제문'이 실려 있다.

 

- 이재성(1751~1809) : 연암의 처남이다. 연암보다 열네 살 밑이지만, 연암은 그를 친구처럼 대했다. 비평적 감식안이 빼어나 연암의 글에 대한 평을 많이 남겼다. 동시대인 중 그만큼 연암 문학의 핵심을 꿰뚫어 본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연암은 새 글을 쓰면 그에게 보여서 비평을 부탁하곤 했다고 한다.

 

- 박제가(1750~1805) : 연암의 문생이었으며 승지를 지낸 박평의 서자로 호는 '초정', '정유'이다. 문학적 재능은 있었으나 서얼 출신인 까닭에 등용되지 못하다가 정조 3년 규장각 검서관이 되었다. 저서도 '정유각집' '북학의' 등이 있다. 박제가는 훗날 '북학(중국을 배우자는 주장)'을 강조한 결과 조선인은 조선어를 버리고 중국어를 써야 한다는 주장을 할 정도로 주장이 강하고 경솔한 데가 있었던 듯하다. 그런 점을 염려하여 연암은 박제가의 책 서문에 그 유명한 '법고 창신'의 문학 이론을 쓴다. 그 글이 이책에 '초정집 서문'으로 실려 있다.

 

- 이덕무(1741~1793) :자는 '무관'이다. 박학하고 제주가 있었음에도 몹시 겸손했다. 연암 주변의 서얼 출신 중 연암이 가장 가깝게 여긴 사람인 듯 하다.

 

 

★ 연암의 글

1. 법고 창신론 : '초암집 서문'에 실린 글을 중심으로.

  연암의 사유와 글쓰기의 특징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법고창신'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책에 실린 '초정집 서문'은, '문장을 어떻게 써야 하는가? '란 질문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당시에 통용되고 있던 두 가지 입장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이 '법고(法古)'와 '창신(創新)' 이다. '법고'란 옛 것을 본뜬다는 뜻이고, '창신'이란 새것을 만들어 낸다는 뜻이다. '법고'를 강조하는 입장은 모방에 힘쓰게 되어 겉모습만 본뜨고 그 정신은 놓치기 싶고. 반대로 '창신'은 새것만들기에 급급하다 보면 종종 괴상하거나 허왕되거나 도를 넘거나 편벽된 글을 쓰게되어 상도(常道)에서 벗어나게 된다고 말한다. .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 아아! 옛 것을 모범으로 삼는 사람은 낡은 자취에 구애되는 것이 병이고, 새것을 만들어 내는 사람은 상도에서 벗어나는 것이 탈이다. 참으로 옛것을 모범으로 삼되 변통할 줄 알고, 새것을 만들어 내되 법도가 있게 할 수 있다면, 지금 글이 옛날 글과 같을 것이다."

  '낡은 자취에 함몰된다'는 것은 이전의 대가들이 쓴 글의 형식이나 자구, 표현 등을 본뜨려고 한 나머지 대가들이 보여준 위대한 글쓰기의 정신을 창조적으로 계승하고 발전시키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전통의 계승이 아니라 전통의 피상적 답습에 머무르고 말았다는 지적이다.

'상도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의도적으로 신기한 것을 만들어내려고 한 나머지 법도에서 벗어나 편벽한 것을 추구하거나 기이한 것을 추구하는 경향을 가리키는 말이다. 창조적이기는 하나 자아와 세계의 내면에 대한 충실한 성찰과 개인과 사회의 긴장된 관계에 대한 탐구와 문제의식이 부족하게 되었다는 지적이다. 이는 명나라 말 문학적 양대 문학적 경향을 토대로 한 말이다. 또 이는 곧 당대 조선사회의 병폐이기도 했다.

그래서 자신의 새로운 명제를 내세운 것이 '옛 것을 모범으로 삼되 변통할 줄 알고 ('법고이지변(法古而之變)'), '새것을 만들어 내되 법도가 있게 한다('창신이능전(創新而能典)')이다. 이것이 연암의 '법고창신론'의 핵심이다. 법고창신론이란 '법고하고 창신한다'는 뜻이 아니라 '법고해서 창신한다'는 뜻이다.

'법고이지변'이란 전통을 배우되 전통에 구속되지 말고 전통을 재창조하라는 말이다. '법고'에 그치고 않고 '지변'하는 능동적인 행위에 의해 과거 텍스트들은 새롭게 재해석되면서 창작의 밑거름으로 활용된다. 또한 '창신'이 기괴함과 신기함을 숭상하면서 경박함에 빠지지 않으려면, '능전'이 필요하다. '능전'이란 법도가 있다는 뜻이다. 전통에 대한 자각과 고려를 통해 창신을 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지변'은 창신과 연결되고, '능전'은 법고와 연결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글은 그의 제자였던 초정 박제가의 문집에 써 준 글이다. 아마 재주있고 날카로운 박제가가 창신의 폐단에 빠져들 위험을 경계하여 써 준 글일 터이다.

 

2. 독서론: '소완정 기문'을 중심으로

  이서구가 자신의 서재에 '소완(素玩)'이라는 편액을 걸고 연암에게 기문을 청해서 쓴 글이다.

처음에 연암은 질문을 던진다. '물속에서 노니는 물고기는 물을 보지 못하는데 그거 왜 그런지 아나?' 집에 많은 책을 쌓아두고 다독하며 책 내용을 달달 외우는 독서법에 대한 문제의식을 끌어내기 위해서 던진 질문이다. 다독과 박학의 독서는 종종 정심(精深)한 독서를 방해하며, 잡다한 지식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데 급급하게 한다.

그러면 어찌해야 하는가? 명민한 제자와 문답을 통해 답을 제시한다.

 

약(約) : 비판적 거리를 통해 텍스트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것.

'약'이란 '요약' '간요'등의 뜻을 담고 있는데, 여기서는 책속에 함몰되거나 글 속에 갇히지 말고 그 요체 내지 정수를 간파하거나 통찰해야 함을 뜻하는 말이다. 텍스트에 함몰되지 않고 일정한 비판적 거리를 둔 채 이루어지는 성찰적 글읽기를 강조하기 위해 이끌어낸 개념이다.

비판적 거리를 확보하고 능동적으로 책 내용을 판단하고 음미하면서 그 요점을 파악하는 '꿰뚫어 읽기'이다. 연암이 독서법에서 강조한 '비판적 거리'는 글쓰기에서 보이는 '서사적 거리'와 연결되며, 바로 이 서사적 거리에서 아이러니가 나오기 때문이다. 연암의 창조적. 비판적 글읽기는 그 창조적 비판적 글쓰기로 이어지고 있다. 실제로 연암은 남들보다 책읽는 속도가 3배쯤 느렸다고 한다.

 

오(悟) : 정신집중을 통해 텍스트의 이치를 환히 깨닫는 것

 

" 눈으로 볼 것이 아니라 마음에 비추어 봐야 한다는 이치를 가르쳐줌세"

 

'오'라는 글자는 어떤 계기에 의해 홀연 마음이 환해진다는 뜻이다. 둥근 유리알을 통과한 햇빛을 종이의 한 점에 모으면 갑자기 불꽃이 확 일듯이, '오'는 어떤 질적 비약을 내포한다. 이것은 정신의 집중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나를 적극적으로 개입시키는 행위, 자신 자신에 비추어 보며 독서함을 뜻한다. 이런 독서는 실존적이다. 그리고 실존적이기에 주체적일 수 있다.

 

완(玩) : 마음은 물론 온 몸으로 텍스트의 안과 밖을 읽어내는 것

 

" 가령 지금 자네가 문풍지에 구멍을 내어 한쪽 눈으로 뚫어져라 보고 , 둥근 유리알고 빛을 모으듯이 마음으로 깨닫는다고 치세. 비록 그렇더라도 창이 투명하지 않으면 빛을 받아들일 수 없고, 유리알이 투명하지 않으면 정(精)을 모을 수 없는 법일세. 대저 마음을 밝히는 도(道)란, 텅 비워 물(物)을 받아들이고 담박(澹泊)하게 하여 사사로움이 없는데 있나니 이것이 이 서재 이름을 소완(素玩)이라고 한 이유일 테지"

 

'정(精)'은 천지 만물이고, 이 천지 만물이 책의 에센스라는 뜻이다. 이 말로써 책과 천지만물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책이란 그 자체로서 자족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속에서 존재하며, 사물이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 다릴 말해 책이란 현실을 담고 있으며, 사물과 관련되어 있다. 연암에 의하면 책의 '정'은 책 바깥에, 즉 현실과 사물 속에 있다. 따라서 책읽기는 책 너머의 현실과 사물에 대한 통찰일 수밖에 없다.

'물(物)'이란 단순히 물리적인 물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나' 이외의 일체의 대상을 뜻한다. 자연과 타자가 모두 포함된 말이라 할 수 있다.

'담박'이란 욕심과 편견, 선입견이 없는 마음의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곧, 마음을 비우고 담박하게 하는 일이다.

'완'은 요리조리 궁구하여 체득한다는 뜻이다. 음미한다는 말과 같은데, 사물의 속 내용을 새겨서 맛보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연암은 '완'을 풀이하기를, 입으로 맛봐 그 맛을 알고, 귀로 들어 그 소리를 알며, 마음으로 이해하여 그 정수를 아는 것이라고 했다. 말하자면 '완'은 몸의 감수성과 상상력을 작동시켜 대상의 정수를 파악하는 행위하고 할 수 있다.

 

 결국

문풍지에 구멍을 내어 한쪽눈으로 뚫어져라 보듯이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여 독서하고, 둥근 유리알고 빛을 모으듯이 마음으로 깨닫는다 할지라도 마음을 맑게 하고 마음을 비우지 않으면 물(物)을 받아들일 수 없고 정(精)을 포착할 수 없기에 '완(玩)에는 이를 수 없다. 욕심이든 편견이든 마음에 뭔가가 꽉 차 있으면, 마음속으로 사물 본연의 모습이 들어올 틈이 없다. 사물 본연의 모습이 들어오지 않는다면 책의 '정'을 온전히 포착한 것이라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마음 비우기'는 가장 깊은 경지의 책읽기을 위해 필수적인 조건임을 알 수 있다.

 

 

 

'책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년이 온다  (0) 2020.08.01
온 더 무브 on the move  (0) 2019.04.26
아픔이 길이 되려면  (0) 2019.01.12
미산 스님 초기 경전 강의  (0) 2018.06.22
라마야나  (0) 2018.0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