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온 더 무브 on the move

여름숲2 2019. 4. 26.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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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더 무브

          지은이 : 올리버 색스

                옮긴이 : 이민아

                출판사 : 알마 출판사








  이 책은 자서전이다. 익히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라는 책은 알고 있었지만, 저자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우연히 읽게 되었는데, 뜻밖에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1. '올리버 색스 Oliver Sacks'는?


  - 1933 ~ 2015년 (안암이 간으로 전이 되면서 82세 사망)

 - 학력 : 옥스퍼드 대학 퀸스칼리지에서 의학 학위를 받았고, 미국 샌프란시스코와 UALA에서 레지던트 생활을 했다.

 - 경력 : 1966년부터 베스에이브러햄 병원에서 신경과 전문의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후 알베르트아인슈타인 의과 대학   과 뉴욕대학을 거쳐 2007년부터 2012년까지 컬럼비아 대학에서 신경정신과 임상교수로 일했다.

-수상 : 과학저술가에게 수여하는 '루이스 토머스 상' 수상, 대영제국 커맨더 훈장 수령, 옥스퍼드대 등에서 명예박사 학위 받음

- 저서 :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뮤지코필리아' '환각' '마음의 눈' '목소리를 보았네' '나는 침대에서 내 다리를 주웠다' '깨어남' '편두통' 그리고 자서전' 온더 무브'


2. 가족

 영국 런던에서 의사였던 유대인 부모(어머니는 외과의, 아버지는 내과의로 가정에서 진료했다)의 막내로 태어났다 . 형으로  데이비드,  마커스 마이클이 있었는데, 5살 더 많았던 마이클형은 10대에 조현병이 발병하여 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부모가 주치의로 형을 돌봤는데, 신경안정제의 적정량을 찾지 못해 발현기와 안정기를 되풀이하며, 정신병원과 집을 오가며 살았다. 마이클 형은 증상이 나타나면 격렬한 불안 행동으로 고함치거나 물건을 던지는 발작을 했고, 신경안정제를 먹으면 파킨슨 환자처럼 발을 질질 끌며 걸었다. 그 사이의 적정량을 찾는 것은 늘 어려웠고, 신경안정제는 정신분열증의 음성증상(은둔하는 경향, 정서적 메마름 등)에는 효과가 없었다. 그것을 지켜보면서 그는 혼자서는 차를 끓여마시지 못할 정도로 일상생활 적응력이 없는 이런 환자에게 어떤 약물을 어떻게 쓰느냐에 의존하기 보다 즐겁고 의미 있는 인생(지원프로그램. 공동체, 존중받는 환경 등)을 누리게 하는 총체적 접근법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이클 형을 빼고도 그에게는 리니 이모를 비롯해서 유대교 공동체의 따뜻한 울타리가 있어 비교적 어려운 시기를 잘 견뎌낸 듯하다. 그의 가족 중에는 부모님과 형 마이클이 인상적이다.

 아버지에게는 몇세대에 걸쳐 진료해온 가족들이 있어서 젊은 환자가 왔을 때 " 자네 증보부가 1919년에 아주 비슷한 문제를 겪으셨지"라고 말하기도 했다니, 참 부러운 일이다. 단순히 진료만 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의 몸 상태 못지 않게 내면의 상태까지 이해했던, 그리고 장구한 시간을 통해 축적해갔던 그들의 삶과 문화가 문만 닫고 나면 절벽이 되는 우리들의 삶과는 너무나 다르니 말이다. 또 인상적인 것은 그의 아버지는 일주일에 두세번씩 콘서트 관람을 했는데,  말년에 이르러서는 일부 연주자들과 함께 오랜 단골 고객으로서 나름의 전설이 되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엔 마흔다섯살이 된 마이클 형이 그 아버지와 음악회에 같이 다녔다니 참 아름다운 풍경이다.

 마이클 형은 정신병을 앓고 있으면서도 우편배달 일을 계속했고(단순한 안부를 묻은 전보도 비밀통신이라고 믿긴 했지만), 런던 시내를 활보하는 것을 즐겼다. 그러나 쉰여섯에 실직자가 된 후, 장시간 산책도 그만두고 멍하니 줄담배를 피우면서 시간을 보냈는데, 주치의를 아버지에서 다른 의사로 바꾸면서 빈혈과 갑상선 기능 저하증을 찾아내 투약하면서 환청도 사라졌다. 1990년 94세로 아버지가 죽자 런던에 살던 또 다른 형 '데이비드 형'이 윗동네 메이프스베리의 정신질환 유대인 요양원을 찾아내 그곳에 마이클형의 거주지를 옮겼다. 그러나 같은 동네여서, 형은 늘 다니던 유대교 회당, 은행, 단골가게를 다닐 수 있었고,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다른 입소자들 사이에서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으로 평생 해온 독서의 결실을 맺었다. 데이비드 형은 토요일 저녁마다 마이클형을 불러 안식일 만찬을 가졌고, 조타 리즈가 꼬박꼬박 삼촌을 방문해 필요한 것을 챙겼다. 마이클 형은 이 모든 변화를 의젓하고 의연하게 받아들였으나, 데이비드 형이 죽고 자신도 몇차례 수술을 하다가 2006년 다리 동맥류로 수술을 준비하던 중 '나가서 담배 한 대 피우고 와야겠다' 그러고는 들것에서 떨어져 죽었다.


3. 내면 풍경

 그의 삶에 영향을 끼친 2가지 어린시절의 경험이 있는데, 하나는 형 마이클의 발병으로 인한 음울한 환경이고, 다른 하나는 2차 세계대전 중에 피신을 겸해 보내진 기숙학교에서의 폭력적인 경험이 그것이다.  이 경험은 그의 내면에 깊은 트라우마를 형성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다른 하나는 성정체성과 관련된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18살에 아버지가 그의 성정체성에 대해 물었는데, 그는 남자를 선호한다고 말하면서 어머니에게는 말하지 말라고 했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어머니는 그에게 " 가증스럽구나. 너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해," 하고 말했다. 그는  이 말이 그의 내면에 죄의식으로 주입되어 거의 평생을 따라다녔다고 고백한다.

 이런 저런 삶의 트라우마와 당시 영국의 보수적이고 정체된 환경이 그가 대학을 졸업한 후 미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평생을 살게 된 이유일 터이다.

 

4.삶의 풍경

  ① 모터사이클  

    10대 때부터 시작한 라이딩에 대한 열정은 미국에서도 계속되었다. 그는 모터사이클 BMW R60을 타고 주말동안 1000km씩 달려 사막에 몸을 뉘었던 광적인 모터사이클을 즐겼다. 때로는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수천킬로을 달렸는데, 그는 그때의 느낌을 '황홀한 꿈길을 거니는 듯했다'고 고백한다. 동호회에서 함께 타기도 했지만, 그는 주로 혼자 먼 거리를 스피드있게 달려 그곳에서 자고, 월요일 아침 평범한 의사로 복귀하는 '주말의 이중생활(하얀 인턴 가운과 짐슴가죽옷)'을 한다. 데스밸리에 자주 갔고, 가끔은 안자보레고 사막까지 가거나 멕시코까지 가기도 했다. 주행거리 16만 킬로미터를 넘겼을 때, UCLA를 떠나 뉴욕으로 옮겼고, 1965년 무렵부터는 동부의 교통체증 탓에 길 위의 삶은 끝난다.

 

② 역도와 수영

   한때 캘리포니아 주 신기록을 수립할 정도로 역도(풀스쿼트 종목 270kg 600파운드에 도전 )에 매달렸으며, 몇번이나 죽을 뻔 할 정도로 수영을 즐겼다. 뭐든 한번 시작하면 적정한 양을 생각하며 하기보다는 끝까지 몰아부치는 그의 무모한 방식은 의사라는 직업이나 작가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결국 무리한 운동으로 한쪽 넓적다리 네갈래근 힘줄이 파열되어 병원에 입원하기도 한다.


③ 마약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UCLA 환자들에게 헌신하다 모터사이클을 타지 않는 주말이면 가상여행(대마초나 나팔꽃씨, LSD로 떠나는 마약여행)에 몰두했다. 그러다가 암페타민에 빠져들어 암페타민을 흠뻑 적신 대마초의 노예가 되어 잠도, 밥도 거부하다가 결국 주사용 메스암페타민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암페타민이 주는 활홀경은 아무 노력없이 그 자체로 충족되는 완전함이었지만, 그것은 동시에 공허였다. 다른 목표, 흥미, 욕망까지 자리할 수 없는. 에인절더스트angeldust.  한 다락방에서 열린 에인절더스트 '파티'에 초대되었다가, 조금 늦게 가는 바람에 환각상태의 광란을 지켜보게 된다. 그는 곧 응급센터에 전화를 걸었고, 이 사건으로 에인절더스트는 입도 대지 않게 된다. 1965년 경부터 섬망 증상이 나타났고, 석달동안 무려 40키로그램이 빠지기도 한다. 그러던 1965년 마지막 날, 암페카민에 취해 있다가 명징한 시간이 찾아와 ' 올리버, 너 살고 싶다면 도움을 받아야해' 하는 각성을 하게 된다. 그는 이 중독과 자기 파괴에 뿌리깊은 정신과적 문제가 깔려 있으며, 이 문제를 건드리지 않는 한 결국에는 다시 마약을 찾을 것이고, 머지않아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1966년 초 수소문 끝에 '센골드'박사를 만났고, 마약을 끊어야 상담이 가능하다고 해서 고통스러웠지만 결국 마약을 끊게 되었다. 그는 센골드 박사를 만남으로써 만인의 예상을 뒤엎고 여든이 넘도록 살아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죽기전까지 센골드 박사를 일주일에 두번씩 50년을 꾸준히 만나오고 있다.


 ④의사(신경과 전문의)

  미국 샌프란시스코 마운트시온 병원에서 인턴과정을 마치고, 1962년부터는 UCLA(캘리포니아대학교 로스앤젤레스)에서 레지던트 과정을 밟았다. 1965년 알베르트아인슈타인 의과대학 신경화학과 신경병리학 연구원으로 일하기 위해 뉴욕으로 옮겨간다. 그는 뇌세포에 비정상적인 지방질이 축적되는 비방질 축적증이라는 희귀병에 관심을 갖고 연구했는데, 이 모든 과정을 꼼꼼하게 기록한 실험공책을 바이크 짐칸에 두고 고속도로를 달리다 말 그대로 다 날리고 만다. 또한 원심분리기에서 햄버거 부스러기가 나오거나 실험실 수초를 잃어버리는 등의 실수로 연구원 생활을 접고, 임상의사로 생활하게 된다.

 1966년 가을, 알베르크아인슈타인 의과대학교와 결연을 맺은 만성질환 클리닉 베스에이브러햄 병원에서 환자를 돌보기 시작한다. 이곳 환자 500명 중 80명가량이 1920년대 초 세계를 휩쓸었던 유행병인 기면성뇌염(수면병)의 생존자였다. 이 수면병으로 수천 명이 즉사했고, 회복된 것으로 보였던 사람들 가운데 적지 않은 수가 몇십년이 흐른 뒤 기이한 뇌염후증후군에 시달렸다. 많은 사람들이 중증 파킨슨 상태로 얼어붙었고, 일부는 특정자세로 몸이 굳은 긴장증(무의식 상태는 아니나 이 병에 공격받은 뇌의 특정부위에서 의식이 정지된 상태) 상태에 빠졌다.환자들 가운데 일부가 이런상태로 30~40년을 지내왔다고 한다. 애초 이 병원도 기면성뇌염 초기 발병자들을 수용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석고상처럼 굳은 기면증 환자들도 어쩌다 음악으로 춤을 추거나 몸을 움직이는 역설현상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는 이 환자들에게 매료되었고, 1년반동안 이 환자들의 진료내용을 기록하고 촬영하거나 녹음했다. 결국 1969년 당국의 허가를 받고 파긴슨병 환자에게 쓰는 엘도파 투여 실험을 진행하게 된다. 엘도파를 처방받은 뇌염 후 증후군 환자들은 수십년동안 어떤 중지상태에 있다가 신체적 능역, 지적 능역 지각기능, 감정까지 깨어났다. 그는 1970년 '미국의학협회저널'에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1년동안 엘도파를 투약했던 환자 60명에게서 나타난 엘도파 반응을 담은 연구결과를 보고했다. 그 60명 거의 전원이 처음에는 좋은 반응을 보였지만 그들 모두가 이르든 늦든 통제에서 벗어나 복잡하고 때로는 기이하며 예측불가능한 상테에 들어섰다. 그는 이 과정을 '부작용'으로 볼 것이 아니라 전체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없어서는 안될 부분으로 봐야 한다는 견해을 밝힌다. 이 경험이 그의 책 '깨어남'에서 병례사로 써졌고, 나중에는 영화 '사랑의 기적'으로 만들어졌다. 이런한 그의 생활은 30년 동안 계속되었으며, 자신이 진료하고 경험한 내용을 책으로 썼다.


⑤사랑

  18살에 성정체성을 고백한 후, 어쩌다 암스테르담에서 일회성 만남을 가졌던 이외에 그에게는 3번의 사랑이 있었다.  

  첫번째는 1953년 옥스퍼드대학교 모들린 칼리지에서 만난 '리처드 셀리그' (리처드는 스물넷, 그는 스물).  리처드는 이따금 막 완성한 시를 가져와 보여주었고, 그는 그가 쓴 생리한 에세이 몇편을 보여주었다. 어느날 그가 사랑을 고백하자 리처드는 꼭 안아주고는 " 알고 있어. 나는 그런 쪽은 아니지만 네 사랑을 고맙게 생각해. 그리고 나도 널 사랑해 . 내 식으로 " 라고 말한다. 그 후에도 우정은 계속되었는데, 어느날 리처드가 찾아와서 상처를 보여주었는데, 림프육종의 종양이었고 2년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리처드는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하기로 결심했고, 가수인 메리 오하라와 결혼해 뉴욕으로 갔고, 시창작을 하다 15개월 뒤 세상을 떠났다.

  두번째는 1961년 초 샌프란시스코 Y에서 운동하다 만난 ' 멜'. 19살이었던 멜은 해군으로 시간있을 때마다 Y에 와서 훈련했는데, 운동이 끝나면 그가 모터사이클로 멜을 함정까지 태워다주곤 했다. 1년 동안 가까이 지내면서 주말이면 같이 모터사이클을 타고 야외에 나가 캠핑하며 수영이나 레슬링을 했다. 1년쯤 그렇게 지내다가 군 복무가 끝나 대학에 진학한 멜과 함께 살게 된다. 행복하지만 아슬아슬한 나날들이었는데,  어느날 멜을 마사지해주다가 그만 사정하게 되었고, 다음날 아침 멜은 떠나갔다. 그후로도 멜과 15년 동한 연락하며 지냈다.

  세번째는 오랫동안 병원과 글쓰기만 하며 홀로 지내다가 2008년 75세에 만난 작가 '빌리'. 2009년 12월 빌리는 사랑은 고백했고, 비로소 그는 함께 미술관을 가고 여행을 다니는 등의 일상적인 행복을 누리게 된다. 그는 이 책을 빌리에게 헌정했다.


⑥글쓰기

  14세부터 쓰기 시작한 일기가 1,000권에 이른다고 하니, 그가 얼마나 많이 쓰는 일에 매달렸는지 알 수 있다. 모터사이클을 타다가도, 여행을 하면서도, 아무곳에서나 짬이 나면 글을 썼다. 그는 꿈 속이나 밤 중에 생각이 떠오를 경우를 대비해 항상 머리맡에 공책을 놔두고, 수영장이나 호숫가, 해변에도 웬만하면 한 권 놔둔다고 한다. 일기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도, 지난 일기를 꺼내 읽기 위해서도 아닌, 자신과 단둘이 대화하기 위한 필수적인 형식의 글이었다고 그는 말한다.

  편지 또한 그에세는 중요했는데, 그는 받은 편지는 물론 쓴 편지까지 사본으로 보관했다. 일기와 편지는 그의 잘못된 기억과 변덕스러운 기분으로 착각했던 온갖 오류를 바로잡아주기도 하는 것들이다.

  그의 글쓰기 작업에서 방대한 분량은 임상일지다. 베스에이브러햄병원의 환자 500명, 작은 자매회 입소자 300명, 브롱크스 주립병원의 입원및 재래환자 1,000명을 진료하면서 1,000권이 넘는 공책을 썼다.

 이런 글들이 모여 그의 책으로 재탄생하게 된 것일 것이다.



 그의 친구였던 스티브가 그의 생일에 써 준 시를 인용하면서, 항상  자신을 삶의 끝쪽까지 밀어붙였던, 비록 깨지고 넘어지더라도 물러서지 않았던, 앞으로 나갔던 on the move 올리버 색스의 삶에 경의를 표한다.


  소철과 사랑에 빠진 이 남자

  오토바이 광고의주인공이 되어도 좋았을 이 남자

  다중다양성의 왕

  힙! 해피 버스 아이 데이 birth-i day

  프로이트 옹이 해낸 것을, 그의 정신과 심리를  능가한 당신.


  한쪽 다리로 서고 편두통 앓고 색을 잃고( * 그의 병력. 한쪽 시력 상실)

  화성에서 깨어나 모자를 생각한

  올리버 색스

  여전히 인생을 극한까지 밀고 나가는 이 남자

  당신이 헤엄쳐 간 자리에는 돌고래들이 뒤를 따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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