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이집트(09.1.14-22)

제 6일(아부심벨, 아스완댐, 미완의 오벨리스크)

여름숲2 2009. 2. 25. 13:38

아부심벨

크루즈는 아스완에 정박했다. 마지막 밤이다.

아부심벨 가는 길은 밤을 온전히 보내지 못하고, 새벽 3시에 출발해야 했다. 콤옴보(치안관계 상 경찰과 함께 가는 시간)가 출발하는 시간에 맞춰야 하기 때문이다. 덕분에 4시간을 밤인지 새벽인지 하면서 차안에서 보내게 되었다.

그리고..... 또 다시 떠오르는 태양!  아몬! 파라오!

 

 

 

드디어 람세스 2세와 그의 아내 네페르타리의 신전이 있는 아부심벨에 도착했다

보이는 것이 람세스의 신전인 대신전이다.

 

대신전은 정면 높이 32m, 너비 38m, 안쪽 길이 63m이며 입구에 높이 22m의 람세스 2세의 상(像) 4개가 있다.
제1실에는 람세스 2세를 오시리스 신을 본떠 만든 8체의 상과 6면의 넓은 전쟁화(戰爭畵)와 명문(銘文)이 있다.

제2실과 제3실의 벽화는 종교의식()에 관한 것이고 제4실에는 4개의 신상(라호라크티, 아몬레, 프타하, 람세스)이 있다

신상은 항시 어둠 속에 있으나 2월 20일경과 10월 20일경 두 번만은 아침 해가 신상의 전신을 비치게 되어 있다

다만 죽음의 신 프타하만은 그때도 어둠 속에 있다고 한다.

 

*아부심벨

고대 이집트 왕 람세스 2세(BC 1279~1213 재위)가 지은 2개의 신전 유적.

주신전 앞에 있는 4개의 거대한 람세스 좌상은 고대 이집트 미술에서 가장 장대한 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이 신전은 1960년대의 복잡한 토목공사에 의해 나일 강의 수위가 상승했을 때 수몰 위험을 모면하고 구제되었다. 이집트 아스완 행정구 코로스코(지금의 쿠루스쿠)의 남쪽, 나일 강 서안의 사암절벽을 깎아 만든 이 신전은 1813년 재발견됨으로써 비로소 외부세계에 알려졌고, 1817년 이집트학 전문가 조반니 바티스타 벨초니에 의해 처음으로 조사되었다.

20m나 되는 람세스 좌상은 움푹 들어간 절벽을 등지고 있으며 2개는 주신전 입구 양쪽에 하나씩 놓여 있다. 이 좌상의 발 둘레에는 람세스의 왕비 네페르타리와 자식들을 상징하는 작은 상이 조각되어 있다. 남쪽에 있는 1쌍의 좌상에 새겨진 낙서들은 BC 6세기에 이집트 용병으로 복무하던 그리스인들이 새긴 것으로 초기 그리스 문자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준다. 이 신전 자체는 태양신인 아몬 레와 레 호라흐테에게 바쳐진 것이며 절벽 안쪽으로 56m를 파서 만든 3개의 연속된 홀로 이루어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전 내부는 왕의 여러 조상과 함께 왕의 생애와 업적을 보여주는 여러 채색부조로 장식되어 있다. 이 신전은 1년에 어느 특정한 며칠간은 하루의 첫번째 햇살이 신전 전체를 꿰뚫으며 들어와 가장 안쪽에 있는 성소 제단까지 비치도록 지어졌다. 주신전의 바로 북쪽에 있는 작은 신전은 여신 하토르를 경배하기 위해 왕비인 네페르타리에게 바쳐진 것이며 10.5m 크기의 왕과 왕비의 조상으로 장식되어 있다.

1960년대초 이 근처의 아스완 하이 댐 건설로 저수지가 생겨 아부 심벨 유적이 수몰당할 위험에 처하자 유네스코와 이집트 정부가 주관하여 이 유적을 보호할 방법을 찾았다(→ 예술품 보존과 복원). 1964~66년에 세계 50여 개국에서 자금을 지원받아 기사·과학자 들로 이루어진 국제적인 팀과 노동자들이 절벽 꼭대기를 파서 2개의 신전을 완전히 들어내 강바닥에서 60m 높은 지점에 복구해놓았다. (백과사전)

 

 

 

 

* 람세스 2세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이집트를 통치한 파라오다. 신왕국 18왕조 말기의 유약한 투탕카멘(기원전 1340∼1331)이 죽고, 늙은 대신 ‘아이’와 호렘헵 장군이 짧게 통치하다가 전차 지휘관이었던 람세스 1세가 제19왕조를 연다.

그의 아들 세티 1세(기원전 1294∼1279)가 19왕조의 초석을 다진 후, 이집트의 영광을 크게 떨친 이가 바로 그의 젊은 아들 람세스 2세(기원전 1279∼1212)로, 약 67년간이나 나라를 다스리며 자신의 흔적을 온 이집트 신전에 남겼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곳은 아부심벨 신전이다. 카이로에서 나일강을 따라 남쪽으로 약 890㎞ 가면 아스완이란 도시가 나온다. 예전에는 누비아 광산에서 캐낸 엄청난 금과 아프리카에서 생산된 목재, 동물의 가죽, 상아 등 진귀한 물품들이 집결되던 곳이었지만 오늘날은 거대한 아스완 댐으로 유명하다. 여기서 차를 타고 나일강 상류를 향해 사막 길을 서너 시간 달리면 아부심벨이 나온다. 이곳의 황량한 돌산에 람세스 2세가 세운 아부심벨 대신전과 소신전이 있다. 아부심벨 대신전 앞에는 높이가 약 20m인 거대한 람세스 2세의 조각 4개가 있어, 이미 피라미드를 본 사람들도 그 장엄함에 감탄사를 연발한다. 안으로 들어가면 거대한 기둥들과 람세스 2세의 입상 8점이 늘어서 있으며, 벽에는 수많은 부조가 새겨져 있다.

이 부조들은 람세스 2세가 주도한 카데쉬 전투의 승리를 묘사한 것이다. 카데시 전투는 현재 시리아 영토에서 벌어진 이집트와 히타이트 왕국 간의 대규모 전투다. 이집트는 기원전 13세기쯤 아나톨리아 반도의 하투샤(현재 터키 중부의 보아즈칼레)를 중심으로 세력을 떨치던 히타이트 왕국과 근동 지방을 중간에 두고 다투고 있었는데, 람세스 2세는 기원전 1274년 4월 카데쉬를 향해 약 5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원정을 떠난다

람세스 2세는 한 달 뒤 적군의 속임수에 걸려 위기에 처한다. 히타이트군의 공격에 이집트 병사들은 모두 달아나고 홀로 싸운 람세스 2세는 아문신의 도움을 받아 승리했다고 이집트의 기록은 전한다. 그러나 후일 밝혀진 히타이트 측의 기록과 객관적인 정세로 볼 때 람세스 2세는 필사적으로 탈출했을지언정 승리하지는 못했고, 카데시도 여전히 히타이트 왕국의 땅으로 남아 있었다. 그럼에도 람세스 2세는 룩소르의 카르나크 신전, 아부심벨 신전 등에 자신의 승리를 대대적으로 기념하는 부조들을 새겨 놓았다. 후대 학자들은 이런 람세스 2세를 자기현시욕이 매우 강하고 진실을 왜곡하면서까지 기록을 이용해 현실을 지배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시기적으로 보아 람세스 2세 치하에서 모세가 유대인들을 이끌고 대탈출을 한 것으로 보이는데, 약 66년간 고대 이집트를 연구해 온 크리스티안 데로슈 노블쿠르에 의하면, 이집트의 역사 기록에서 그 같은 흔적은 전혀 발견할 수 없다고 한다. 그 시절 많은 유대인들이 왕릉이나 신전을 건설하는 데 동원되었는데, 아마도 이집트인들에게는 사소한 사건을 나중에 유대인들이 기념비적인 사건으로 탈바꿈시켰다고 그는 추측하기도 한다.

아부심벨 대신전 제일 안쪽의 지성소에는 오른쪽에서부터 떠오르는 태양의 신인 라 하라크티신, 신격화한 람세스 2세, 테베의 주신이며 땅의 생식 본능을 지배하는 아몬신, 어둠을 솟아나게 하는 프타 신의 좌상이 나란히 서 있다. 동굴 안의 신상들은 매우 정교하게 배치되어 2월 20일쯤에는 동굴 깊숙이 들어온 햇살이 약 20분 동안 오른쪽으로 이동하며 아몬신, 람세스 2세, 라 하라크티신을 차례로 비췄다. 10월 20일쯤에는 반대로 햇살이 가장 오른쪽의 라 하라크티신을 비춘 후 차차 왼쪽으로 옮겨졌는데, 어둠의 신인 프타신 상은 왼쪽 어깨에만 살짝 햇살이 머물다 간다고 한다.

대신전 옆에는 아부심벨 소신전이 있다. 사랑과 음악과 춤의 여신인 하토르 여신(호루스신의 아내)과 람세스 2세의 부인 네페르타리 왕비를 기리는 작은 신전인데, 이 신전들의 원래 위치는 이곳이 아니다. 1950년대 후반, 이집트의 지도자 나세르가 나일강을 막아 아스완에 댐을 건설하려 하자, 아부심벨 신전이 수몰될 것을 염려한 유네스코의 도움으로 1963년부터 약 10년 동안 해체해 원래 위치보다 약 210m 뒤쪽, 650m 더 높은 지역으로 옮기게 된 것이다.


 

람세스 2세의 상. 다리 밑에 있는 작은 상들은 아내인 네페르타와 그의 딸들이라고 한다

 

 

 

 

 

 

 

 

왕비를 위한 소신전 입구

소신전은 대신전에서 90m 떨어진 북쪽에 있는데, 정면 높이 12m, 너비 26m, 안쪽 길이 20m이며 입구에 높이 10m의 상 6개가 있다

 4개는 왕을, 2개는 왕비를 나타낸다 . 제1실에는 12개의 하토르 여신상의 기둥이 있으며, 각 기둥에는 왕과 왕비의 이야기가 새겨져 있다

 벽면에는 왕이 포로를 희생으로 신에게 바치며 왕비가 옆에 시립해 있는 그림이 있고, 제3실에는 공물봉헌의 그림이 있으며 안쪽 중앙에는 소의 모습을 한 하트호르 신상이 있습니다

 

 

아스완댐

아스완 댐이집트 나일 강아스완 시에 위치한 댐이다. 아스완 하이 댐(아랍어: Arabic: السد العالي;as-Sad al-'Ally)과 아스완 로우 댐이 크게 댐의 구조를 이루고 있으며 이집트 정부의 아스완 댐 건설 목적은 나일강의 범람을 막고 관개 및 농경을 위한 전력발전이다.

나일 강은 매 여름마다 매시 범람했다. 고대 때와 마찬가지로 수천년간 반복된 이러한 홍수는 유역의 토양을 옥토로 만드는 한편 많은 이로운 광물을 배출하면서 농경의 이상적인 환경을 제공해주었다. 하지만 강 주변 거주 인구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목화재배지와 농경지를 보호하고 한편으로 조절할 필요성이 커지면서 댐의 건설이 본격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했다.

가장 처음 구조물은 대영 제국1889년 시작하였으며 그들의 공사는 1902년까지 계속됐다. 공사 기공식은 1902년 12월 10일에 열렸으며 공사에는 영국 내 저명한 건축가 다수가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하지만 1910년대에 이르러 처음의 공사 양식이 적합치 않다는 판단이 대두하면서 한 차례 증축 공사를 하여 댐의 높이를 높인다.

하지만 1946년 댐이 범람하면서 세번째로 한 번 더 공사를 하게 되며 둘째 번에서 6km정도 높이를 더 끌어올리게 된다. 기초 공사는 1952년 시작됐으며 가말 압델 나세르의 쿠데타 이후로 미국과 영국이 혼란기를 틈타 자금 제공에 합의한다. 총 2억 7천만달러를 차관 제공하기로 한 것은 나세르가 아랍 세계-이스라엘 전쟁 기미를 막는 데 협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미 양국은 나세르를 정치적으로 무력화하고자 비밀 회담을 열면서 1956년 7월 차관 제공을 철회한다.

1960년 현대적 의미의 댐 건설이 비로소 시작됐으며 11년 뒤인 1970년 7월 21일에 공사가 완공된다. 사실 공사 완공 전인 1964년 미리 수원 저장을 시작하였으며 총 수원 한계량을 1976년에 처음으로 채우게 된다. 그러나 수원 저장의 계속적인 증가는 인류학자들의 우려를 자아냈다. 주위에 산재했던 고고학유물 때문으로 60년대 유네스코는 문화재 구조 작업에 나선다. 문화재 유적지 탐사 밑 24곳의 주요 장소가 옮겨졌다. 대표적인 곳이 아부 심벨 신전이다. 마드리드뉴욕등 세계 여러 기관과 국가들은 적극적인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이집트 자체로는 아랍계의 오스만 아메드가 발굴 작업을 주도했으며 그의 경쟁자를 물리치며 작업을 해나갔다. 그러나 그는 소련이 당시 제공한 물자에 대해 불평을 많이 했으며 소련 기술자들을 결국에 내쫓아버렸다고 전한다.

아스완 하이댐의 기록은 가히 경이적이다. 길이만 3,830 m이며 넓이는 기본구조물로만 980 m이다. 중심축의 넓이는 40 m, 길이 111 m 이다. 최대 11,000 m³의 수원이 매초 내보내질 수 있으며 추가로 5000 m³의 수원 방출구가 있다. 토시카 운하는 수원과 토시카 수원지를 연결하여 비상사태에 대비하며 그곳의 이름은 나세르 호이다.

아스완 댐 수력발전소
아스완 하이 댐(나사 제공)
아스완 로우 댐

 

 낫세르호수

 

 높이는 111m, 댐 마루부 길이는 3,830m, 부피는 4,430만㎥에 이르며
1960년-1970년까지의 대역사로  10억 달러의 경비가 소요되었다. 
20만명 이상의 노동력이 투입되었다고 한다.

 

 

미완의 오벨리스크 

 

 미완성 오벨리스크핫셉슈트 여왕을 위해 화강암을 자르다 균열이 생겨 중단된 것으로 길이는 41m, 무게 1,267t으로 만약 완성되었다면 규모 면에서 현존하는 가장 큰 오벨리스크가 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미완성 오벨리스크는 당시 오벨리스크의 제작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돌에 틈을 만들어 나무 쐬기를 박은 다음 물을 부어서 팽창력으로 잘랐다고 한다

 

 

누비아 마을

 나일강을 따라 누비아 마을로 가는 길은 시시각각 빛깔을 달리하며 아름답게 빛났다.

오후에서 저녁으로 넘어가는 시간의 햇살이 물결에 부서지는 모습과, 나일강 따라 들어선 마을과 자연경관은 평화롭고 따뜻했다

 

 

 

 1시간을 모터보트를 타고 나일강을 달려 도착한 누비아 마을

집들이 아름다웠다. 가난하지만 모양내어 치장한 지붕이며 창문들, 그리고 파스텔톤의 벽 색깔이 곱고 예뻤다

 

 어는 집에 들어갔더니. 악어를 키우고 있었다.

 

 성실하고 애정을 갖고 일을 하는 가이드와 함께

총 여행 9일동안 상점에 한 번도 안갔다. 자신은 동남아 여행의 상점투어가 가이드로 적성에 안맞았다고 하더니,끝까지 상점을 안갔다.

다만, 옵션으로 간 것이 남는 시간에 간 이 누비아 마을이었다. 돈은 따로 냈지만, 색다른 경험과 누비아인의 실생활을 엿보는 체험은 상당히 좋았다.

 

 딸과 함께 그 집 여주인에게 헤나 문신을 받았는데, 솔직히 솜씨가 투박했다.

가이드 말에 따르면 이집트 사람들은 손이 커서 섬세한 작업을 잘 못한다고 한다. 아무렴! 그렇기도 하고 시골 아낙네가 예술적 재능까지 있으면 어쩌겠는가?

 

 

 누비아 마을의 학교 교실

 

 잠깐 교실 체험을 했는데, 숫자나 이름 등을 따라 읽고 써보는 것이었다. 모두들 자신의 이름을 쓰며 즐거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