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서유럽(09.7.17-26)

제 2일(파리)

여름숲2 2010. 1. 24. 21:36

제 2일- 파리

 개선문

 이른 아침 파리의 여름은 선선한 가을 날씨 같았다.

상그리제 거리에서 하차하여 지하도를 건너 개선문까지 갔다.

유럽 여행은 교과서와의 해후다. 낡은 교과서 사이사이에 흑백으로 보았던 그 사진들이 걸리버 여행기의 거인 나라에서 다시 튀어나오는 느낌이다. 규모가 주는 장대함에 잠시 매료된다.

 

 

 이른 아침 상제리제 거리는 텅 비어 있고, 개선문 앞에만 부지런한 관광객들이 북적인다.

 

 

 개선문

 

 콩코드 광장

 콩코드 광장

 

이 광장은 1755년에서 1775년 사이에 앙쥬 자크 가브리엘(1698-1782)에 의해서 설계되었다. 난간으로 둘러쌓인 도랑으로 만들어진 8각형으로 설계되었으며 프랑스의 대표적 8개 도시(브레스트, 루앙, 릴르, 스트라스부르, 리옹, 마르세이유, 보르도, 낭트)를 상징하는 8개의 동상이 광장을 장식하고 있다.
원래 이름은 루이 15세 광장이었고 1792년에는 레볼뤼시옹 광장이었다가 지금의 이름이 확정된 것은 1830년이다. 로베스삐에르 통치하에는 이 광장의 84,000㎡에 달하는 넓이의 광장이 교수형 장소로 이용되어, 루이 16세와 그의 부인 마리 앙트와네트를 포함한 1119명의 사람들이 비참한 죽음을 맞은 곳이기도 하다.

 또한 로마의 산 피에로의 분수에 영향을 받은 두 개의 분수가 만들어져서 , 북쪽의 분수는 강에서의 유람을, 남쪽의 분수는 바다에서의 항해를 표현하고 있다. .

 

 루브르 궁 건물의 스타일에서 영향을 받은 주랑은 루이 16세 시대의 가장 세련된 모습으로 손꼽히며 장미빛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광장 중앙의 오벨리스크는 230톤의 무게에 23미터의 높이인 이 기둥은 원래 이집트 룩소의 테베사원에 있었던 것을 1831년 이집트의 고관 무하마드 알리가 프랑스에 헌납한 것이다. 기둥에는 상형문자가 새겨져 있다

 

로뎅미술관

오귀스트 로뎅(1840-1917)

 

 로뎅미술관

 

 

 그 유명한 생각하는 사람.

원래는 <지옥의 문> 맨 위에서 있었던 작품으로, 1888년에 독립된 작품으로 크게 하여(높이 186cm) 발표하였다. 최초에는 <시인>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원래 청동석고상은 7개 까지를 진품으로 인정한다고 하며, 그 중 1개가 우리나라의 광화문 로뎅미술관에도 있다.

 

 

 발자크상

일본여행 갔을 때 감동받았던 작품이다.

 

 

 여기 광화문의 로뎅미술관에서 봤던 <칼레의 시민> 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정신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다.

 

*(인용)<칼레의 시민>은 조각가 로댕(Rene-Francois-Auguste Rodin: 1840-1917)이 제작한 조각상입니다. 프랑스의 북부 도시 칼레가 백년전쟁 당시 영국에 의해 포위됐을 때 도시를 구하기 위해 죽음을 자원한 6명의 영웅적인 시민들을 조각한 작품입니다.
1347년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벌어진 백년전쟁 때의 일입니다. 1년 가까이 영국의 공격에 저항해 오던 칼레는 원병을 기대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백기를 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칼레의 항복사절은 도시 전체가 불타고 모든 칼레의 시민이 처형되는 운명을 면하기 위해 영국 왕 에드워드 3세에게 자비를 구했습니다. 완강한 태도를 보이던 에드워드 3세는 항복의 조건을 내 놓았습니다. “좋다. 시민들의 생명은 보장하겠다. 그러나 누군가는 그동안의 어리석은 반항에 대해 책임을 져야만 한다. 이 도시에서 가장 명망이 높던 대표적인 시민 대표 6명은 교수형에 사용될 밧줄을 목에 걸고 신발을 신지 않은 맨발로 영국군 진영으로 가서 도시의 열쇠를 건넨 후 처형되어야 한다.”
그러자 시장이 나섰습니다. 상인이 나섰습니다. 그의 아들도 나섰습니다. 모두 그 도시의 핵심인물들이자 절정의 삶을 누리던 부유한 귀족들이었습니다. 드디어 7명이 되었습니다. 한 사람은 빠져도 되었습니다. 제비를 뽑자는 말도 있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시민들은 기뻐할 수도 슬퍼할 수도 없었습니다. 누군가 6명이 그들을 대신해 죽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칼레에서 가장 부자였던 위스타슈 드 생 피에르가 가장 먼저 나와 말했습니다. “자 칼레의 시민들이여, 나오라. 용기를 가지고.”
이들이 처형되려던 마지막 순간 에드워드 3세는 왕비의 간청을 듣고 그 용감한 시민 6명을 살려 주었습니다. 그로부터 550년이 지난 1895년 칼레 시민들은 이들의 용기와 헌신을 기리기 위해 조각상을 제작하기로 하고 당대 가장 유명한 조각가 로댕에게 작품을 의뢰했습니피에르는 “내일 아침 장터에 제일 늦게 나오는 사람을 빼자”고 제의했고 이에 모두 동의했습니다. 그들의 고통의 밤은 그렇게 깊어갔습니다. 이튿날 이른 아침 6명이 모였습니다. 그러나 생 피에르가 오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그가 궁금했습니다. 모두 안 나온다고 해도 그는 나올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죽음을 자원한 사람들의 용기가 약해지지 않도록 칼레의 명예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것입니다.
이 작품이 바로 <칼레의 시민>입니다. 1895년 6월 3일 기념상이 제막되었습니다

 

  지옥의 문

*(인용) 로댕은 1880년에 프랑스 정부로부터 장식미술관을 위한 정면 현관문의 제작을 의뢰받았다. 그는  알리기에리 단테의 《신곡(神曲)》중 가장 절망적인 부분인 "지옥편"에서 소재를 얻어 그 현관문을 위해《지옥의 문》을 제작했다.

 단테는 지옥으로 들어가는 문 입구에다 이렇게 새겨 놓았다. 이 문을 들어서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인간에게 희망을 앗아간 일만큼 더 잔인한 일이 있을까?  로댕은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지옥의 문을 제작하면서 생각하는 사람을 문 난간 위에 앉혔다. 원래 로댕은《생각하는 사람》에다 "시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시인은 지상을 내려다보면서 명상에 잠겨 있는 단테를 상징하기도 했지만, 나중에 사람들이 마음대로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불러 그대로 통용되었다. 이후《생각하는 사람》은 《지옥의 문》과 독립된 작품으로 더 크게 제작되어, 1904년에 살롱에 출품된 이후 유명세를 탄 뒤, 크고 작은 4종류의 《생각하는 사람》이 만들어졌으며, 여러 곳에 전시되고 있다. 지옥의 문에는 180여명이 넘는 수많은 군상들이 등장하지만, <세 망령>, <생각하는 사람> 그리고 <우골리노와 그의 아들들> , <파올로와 프란체스카>등이 중요한 모티브를 이룬다. 이 모티브들은 모두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이야기에서 가져온 것이다. 세 망령은 지옥의 문 위에 서 있으며, 절망을 상징한다. 이 세 망령은 동일한 인물을 다양한 각도에서 조각해 놓은 것이다. 그 모델이 미켈란젤로의 아담이라고 하기도 한다. 이 인물들은 모두 손을 뻗어 아래 생각하는 사람을 가리키고 있다.

 

 

 

 

 아름다운 정원

 

 아름다운 집(미술관)

 에펠탑

 

 

 *(인용)

에펠 탑(프랑스어: La Tour Eiffel)은 1889년 프랑스 혁명 100주년 기념 박람회 계획의 일환으로 건축가인 귀스타브 에펠의 설계로 건축된 기념물이다. 에펠 타워(Eiffel Tower)로도 불린다. 1889년 5월 6일에 개관하였다.

이 탑은 현재 파리 시의 상징물로 자리매김했다. 높이는 약 320미터 이다.

초기 건축시 미학적 측면, 건축술 측면에서 여러모로 큰 반대를 받았으며 건축 후 그러한 우려를 모두 해소시켰다. 아름다운 곡선의 미가 배어있는 건축물이며 1930년 크라이슬러 빌딩이 완공되기 전까지는 세계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다.

에펠탑은 수많은 부품으로 조립되었다. 약 6400에 이르는 18,038개의 금속 부품과 250만개의 이 사용되었다.

에펠탑은 주철로 만들어졌는데 아주 강도가 높아서 용접하기 어려워 각 부분을 으로 연결했는데 뜨겁게 달군 을 끼워넣어 망치로 두들기는 방법을 썼다. 게다가 250만개의 구멍 중 하나라도 어긋나면 제대로 연결하기가 불가능했다. 각 구멍의 위치는 5000개의 서로 다른 도면에 표시되었고 이 도면은 여러 기술자가 공동작업으로 그려냈다.

탑의 각 부분은 건설 현장에서 1.5킬로미터 떨어진 공장에서 미리 조립되었다. 조립된 부분은 짐마차에 실어 현장까지 운반되었다.

 

 

 

 에펠탑에서 바라 본 파리시내 전경

 

 

 

 

 

 

 

 

 

 

 

 

 

 

 에펠탑이 가장 잘 보인다는 파리광장. 각종 행사와 젊은이들의 공연이 있었다. 자유롭고 여유로운 모습들이었다.

 

 

  

 

 

빼놓을 수 없은 달팽이 요리(에스카르고)

- 좀 먹기가 .....  기분을 빼면 소스 맛으로 먹을 만 했다

 

베르사이유 궁전

 

 베르사이유 궁전은 금빛 대문으로 번쩍번쩍했다. 고풍스럽고 우아한 성 위의 궁전 정도를 예상했었는데, 평지에 고급 주택처럼 들어선 궁전을 보니 좀 당황스러웠다. 생각해보니 드넓게 펼쳐진 파리에서 뭐하러 성을 쌓겠는가. 전쟁의 위험함이나 방어의 목적보다 집의 편리함을 생각한 구조라 생각된다

 오래된 호텔 같은 건물들

 

 

 

 

 

 

 

 

 

 

 

 

 

 

 

 

 

 

 

 내부는 역시 화려함의 극치. 금빛으로 치장하고, 사방을 그림으로 도배하였다. 여백이라는 단어를 아예 지워버린 듯한 건물이다. 우리나라나 일본의 궁전과는 참으로 대조적이다

 

 

 

 

 

 

 

 

 

 

 

 

 

 

 

 

 

 

 

 침대까지 이러면, 꿈자리가 사납지 않을까?

 

 베르사이유의 아름다움은 정원에 있다고 해도 될 듯하다. 조각해놓은 듯 깎아놓은 정원이 아름다웠다. 역시 인공의 아름다움을 과시하는 미적 심미안을 갖춘 유럽인들이다.

 

 

 

 

 

 

 

 

 

 파리 유람선 - 바토무슈

 

 파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중 하나가 세느 강이다. 강 자체의 아름다움보다는 강가에 들어선 옛 건축물들이 뿜어내는 고풍스럽고 우아한 아름다움이다.

 

 

 

 유람선에서는 강가의 시민들이 만들어내는 풍경에 취하고, 강가의 자유로운 사람들은 유람선이 떠 있는 세느강에 취한 듯.....

저물녘의 강 빛과 공기의 색이 낮게 깔리고

 

 

 

 

 

파리 어디에서나 보이는 에펠탑은 그야말로 파리 그 자체다

에펠탑이 흉물스럽다며 철거를 주장했던 모파상이 에펠탑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종종 피신했다던데, 그곳이 어딜까요?

- 네. 에펠탑 2층의 레스토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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