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유타야
- 아래 글들은 태국 문화원 카페에서 인용 요약한 것임
세 개의 강을 운하를 통해 하나로 연결한 아유타야는 수로의 장악을 통한 무역확대로 크게 번성하였다. 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데 익숙했던 아유타야로서는 유럽 등 외세에 대해 비교적 관대한 입장을 견지해 왔다. 아유타야는 16세기 초 포르투갈에 문호를 개방한 것을 필두로 17세기 중엽 나라이왕(1656-1688) 시대에 이르러 국제 관계는 최고조에 달했다.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들이 관료로 등용되었으며, 프랑스의 루이 16세와 외교관계를 수립할 정도로 국제화된 국가였
전성기의 아유타야는 500척의 왕실소유 바지선을 보유하고, 한 왕실사원에는 400개의 불상이 있었으며, 도성 내에만 700개의 불교사원과 3만명 이상의 승려들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한 불교행사에서는 20만대 이상의 보트들이 왕의 바지선을 뒤따랐다고 전하며, 그 길이가 거의 10킬로미터에 이르렀다고 한다. 또 다른 서양인의 기록에 따르면, 동양 최고의 부자인 아유타야 왕의 경호원은 영국인, 포르투갈인, 일본인들로 구성되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심지어 프랑스의 루이 16세가 파견한 프랑스의 신부는 아유타야의 크기가 파리보다 크다고 묘사하고 있다.
왓야이 차이몽콘
'야이'는 크다는 뜻이다. 72m의 높이를 가긴 쩨디 때문에 붙은 이름으로, 줄여 '왓야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본래는 '왓 프라 짜오파야타이'라는 긴 이름을 가졌다고 한다. 1592년 나레쑤언왕이 버마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기념으로 지은 것이라고 한다
* 참고 : 태국의 탑 종류
쁘랑 : 크메르 양식으로 옥수수 모양
쩨디 : 스리랑카 양식의 종 모양(원뿔모양)
* 재질 및 용도 : 홍토 벽돌에 스투코(벽토)를 바른 형태로 부처님의 유물이나 승려, 혹은 군주의 유골을 봉안하였다고 한다
출입문
섬세한 조각
태국에는 이런 와불이 많다. 열반에 든, 혹은 명상에 잠긴 부처님을 형상화한 것일까?
아니면, 날씨가 더워서 이곳 사람들은 항상 이런 자세를 하고 있는 것일까?
이렇게 부처님의 몸에 금박지를 붙인다. 입구나. 불상 앞에서 금박지 종이를 파는 상인들이 있다.
수많은 불상들이 이렇게 온전한 모습으로 쭉 도열해 있다
72m의제디. 가파른 계단(천국으로 오르는 길)을 오르면 작은 방이 나오고, 그곳에 조그마한 부처님이 봉안되어 있고, 가운데는 우물처럼 거대한 구멍이 뚫려 있다.
내부의 모습
안에서 밖을 내다본 풍경
뒷편의 모습으로 수많은 불상들과 화단이 있다
왓 마하탓
마하탓은 '마하(Maha: 위대한)'와 탓(That: 유물)이 합친 말이다. '왓마하탓'이라는 이름의 절은 대개 그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을 차지하고 있다.
아유타야의 '마하탓'은 약 630여 년 전인 1374년에 보롬마라차 1세(재위 1370-1388)에 의해 아유타야 도성의 중심부에 창건된 사원으로서 아유타야 최대 규모의 사찰이다. 그 중앙에는 50m 높이의 쁘랑 대답이 위치하고 있다. 이른 새벽 명상을 하던 왕이 동남쪽에서 빛을 발하는 부처님의유물을 발견하였으며, 신성한 그 자리에 사원을 짓게 된 것이 창건유래이다.
앙코르 제국의 유적에서 보는 것처럼 정교한 평면 구성을 기초로 하여, 중앙에 옥수수 모양의쁘랑탑을 세우고 기단부 코너와 주위에 보조탑을 세워 불교의 메루 우주론(수미산, 부처님의 정토)을 표현하는 것이 특징이다.
부처님의 유물을 보관하고 있음은 물론, 왕실이 후원하는 매우 영향력있는 종단의 종정이 주석하고 있던 곳이었기 때문에 '왓마하탓'은 명실상부하게 아유타야를 대표하는 사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1767년 버마군 침략시 약탈과 방화로 사원의 대부분이 크게 훼손되엇으며, 비교적 좋은 상태였던 중앙의 쁘랑 대탑은 1904년 무너져 내려 지금은 돌무더기 상태로 남아 있다. < 태국문화원 자료>
통기구
무너져 가는 탑과 훼손된 불상들
프라 몽콘 보핏
'프라 시산 펫'과 이웃한 건물로 '프라 몽콘 보핏'이라는 불상을 봉안하고 있어 유명하다. 나레수안왕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불상으로 송탐왕(1611-1628)에 의해 당초 불상이 있던 자리가 왕실전용 화장장으로 바뀌면서 현재의 자리로 옮겨 봉안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수차례, 파괴 되면서 현재는 원형에 가깝게 복원된 불상이 모셔져 있다. 큰 규모의 불상을 봉안하기 위해 6열의 기둥으로 커다란 지붕을 지지하고 있으며, 그 모습은 마치 거대한 새가 날아오르는 모습을 연상케한다. 정면의 박공부분은 바탕을 붉은 색으로 칠하고, 그 위를 금색 부조로 장식하고 있다.
왓 프라 시산펫(Wat Phra Sisanphet)
왕실 전용사원으로 왕이 곧 사원을 지키는 유일한 승려이자 제사장으로서 부처님의 거주지인 '푸타왓'만 있을 뿐이며 승려가 거주하는 요사채 같은 시설은 없다.
'보롬트라일로타낫'왕(재위 1448-1488)이 왕궁건물을 지금의 위치로 이전하고 당초 왕궁건물이 있던 자리를 왕실사원터로 봉헌하면서 만들어지게 된 사원이다. 그의 아들이 라마티보디 2세(1491-1529) 때에야 완공되었고, 아버지와 형을 위해 같은 모양의 불탑(쩨디) 두 개를 건축했고, 그 안에 그들의 유골을 봉안하엿다. 동시에 그는 '프라시산펫'이라는 16미터 높이의 금불상(입상)을 주조하여 불당에 봉안하였다. 하지만 이 불상은 1767년 버마군의 침략에 의해 크게 훼손되어 지금은 없다. 그 후 라마티보디 2세 사후 그를 위한 쩨디가 앞의 두개와 같은 모양으로 세워져 오늘 날 보는 세 개의 장엄한 쩨디군이 완성되었다.
이들의 위풍당당한 모습은 수코타이왕국을 병합하고 란나왕국까지 영향권에 둠으로써 인도차이나의 강자로 부상한 당시의 아유타야의 힘을 상징적으로웅변하는 듯하다.
역시 1767년 버마 침공으로 대부분의 불당 건물들이 폐허로 변했다.
입구
라마티보디 2세와 그의 아버지와 형의 유골을 봉안한 쩨디
허물어진 불당터의 모습
스투코 장식의 흔적
왓 로까이 쑤타람
슬리핑 붓다(열반상). 길이 42m, 높이 5m. 연꽃이 받치고 있으며, 한쪽 팔을 괴고 있는 전형적인 열반상이다. 방콕의 왓포에 있는 붓다의 모델이 되었다고 하나, 알 수 없다. 원래는 불당안에 있었을 것이나. 지금은 모두 없어지고, 붓다만 남아 있다
왓 차이 와타나람(Wat Chai Wattanaram)
이 사원을 지은 쁘라삿통왕은 당초 정식 후계자가 아니었으며, 왕위에 오르기 전에는 ‘짜오프라야 시 수리야웡’이라는 이름으로 막강한 실권을 가지고 있으면서, 선대 두 왕을 제거하고 아유타야의 24대 왕위에 올라 27대왕 나라이 왕까지 이어지는 쁘라삿통왕조를 수립한 인물이다. 권력찬탈과정에서 수많은 목숨이 희생되었고, 취약한 정통성으로 인해 그의 재위기간 중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난 바 있다.
스투코에 남은 섬세한 조각의 흔적
마침 방문한 날 입장이 금지되어 있었다. 지난 여름의 수해로 아직 복구중이기 때문이라 짐작하며, 하는 수 없이 외곽을 따라 한바퀴 쭉 돌아봤다. 옛 폐사지를 강따라 걸어가며, 평화롭고 애잔한 시간이었다. 걸으며 보는 것만으로도 그 규모를 알 수 있었고, 아유타야에서 그 규모가 가장 온전하게 남아 있는 유적으로 보였다. 훼손되긴 했으되, 완전히 파괴되진 않아서, 제 자리에 자기 모습을 보존하고 있는 유적지였다. 그만큼 아름답고, 섬세하고, 웅장했다.
수투코(벽토)에 새겨진 섬세한 조각들의 일부로 미루어 이 건축물이 온전했을 당시의 아름다움을 상상해봤다. 고대 건축물들은 이처럼 시간을 초월하여 그 웅장함과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건만, 현대에는 무엇을 만들며 후손에게 전하려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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