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태국(방콕 파타야, 2012,1,26-31)

첫째 날 (아유타야. 2012,1.27)

여름숲2 2012. 2. 12. 12:50

아유타야

                    - 아래 글들은  태국 문화원 카페에서 인용 요약한 것임

아유타야는 태국 방콕으로부터 북쪽으로 약 8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태국의 76개 주 중 하나로서 2,556평방 킬로미터의 면적에 약 73만 명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는 곳이다. 북쪽으로는 롭부리, 앙통 등과 접하며, 북동쪽으로 사라부리, 서쪽으로는 수판부리, 남쪽으로는 파툼타니, 논타부리, 나콘파톰 등과 접한다. 이 지역은 해발 3-5미터의 낮은 평원지대로서, 땅이 매우 비옥하며, 짜오프라야강, 롭부리강, 파삭강이 만나는 요충지로서 오래 전부터 식량 공급센터로서의 역할을 해왔다.
 짜오프라야강의 해안입구 델타를 기점으로 현 아유타야 지역까지 본격적인 도시화가 전개된 것은 12-13세기에 들어서서 이루어진 것으로 본다. 이 지역은 낮은 습지였기 때문에 주거환경으로는 적당치 않은 곳이었다. 하지만 내륙과 해상교역이 증가함에 따라 점차 개발되었고, 독립국가를 만들기 이전까지는 앙코르제국의 지역 통치센타였던 롭부리에 수익을 가져다 주는 속지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런데 앙코르제국의 영향력이 점차 퇴조하자, 드디어 1350년 우통을 왕으로 하는 타이족 중심의 아유타야라는 국가가 출범하게 되었다. 우통왕은 앙코르 세력을 쫓아 내면서 그 세력을 점점 키워나가 짜오프라야강 일대를 장악하고, 운하의 건설을 통해 롭부리강(북부), 파삭강(동북부), 짜오프라야강(서남부)을 연결함으로써, 아유타야의 군사적, 경제적 번영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아유타야보다 약 100년 전에 출현한 수코타이의 사각형 모양의 도시플랜과는 달리 강을 이용한 입지를 갖춘 아유타야의 도시플랜은 원형(소라형)의 모습을 하고 있다. 도시를 둥글게 둘러싸고 있는 강줄기 안쪽으로는 다시 거미줄 같은 운하망을 구축하였는데, 당시의 어떤 유럽인은 이 같은 모습을 가리켜 마치 베니스같다고 묘사하였다.

 세 개의 강을 운하를 통해 하나로 연결한 아유타야는 수로의 장악을 통한 무역확대로 크게 번성하였다. 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데 익숙했던 아유타야로서는 유럽 등 외세에 대해 비교적 관대한 입장을 견지해 왔다. 아유타야는 16세기 초 포르투갈에 문호를 개방한 것을 필두로 17세기 중엽 나라이왕(1656-1688) 시대에 이르러 국제 관계는 최고조에 달했다.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들이 관료로 등용되었으며, 프랑스의 루이 16세와 외교관계를 수립할 정도로 국제화된 국가였

 전성기의 아유타야는 500척의 왕실소유 바지선을 보유하고, 한 왕실사원에는 400개의 불상이 있었으며, 도성 내에만 700개의 불교사원과 3만명 이상의 승려들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한 불교행사에서는 20만대 이상의 보트들이 왕의 바지선을 뒤따랐다고 전하며, 그 길이가 거의 10킬로미터에 이르렀다고 한다. 또 다른 서양인의 기록에 따르면, 동양 최고의 부자인 아유타야 왕의 경호원은 영국인, 포르투갈인, 일본인들로 구성되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심지어 프랑스의 루이 16세가 파견한 프랑스의 신부는 아유타야의 크기가 파리보다 크다고 묘사하고 있다.

 물론, 아유타야에 평화와 번영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앙코르제국을 대신해서 지역의 신흥강자로 등장한 아유타야의 팽창은 필연적으로 이웃국가들과의 마찰을 일으키게 된다. 특히, 북서부의 강자인 버마와의 군사적인 대결은 아유타야에 뼈아픈 충격을 일으키게 되는데, 그 첫번째가 1569년에 아유타야가 버마에 의해 함락된 사건이다. 하지만, 얼마 후 용맹한 전사이자 지략가인 나레수안왕(1590-1605)에 의해 아유타야는 독립을 쟁취하였고, 수많은 소국들이 아유타야의 속국이 되었다.
  나레수안이 버마로부터 아유타야를 해방시킨 이후 수많은 무역상들이 아유타야로 몰려 들었다. 나레수안 시절에 이미 중국, 일본, 스페인, 네델란드, 포르투갈등과 우호조약을 체결한 아유타야는 적어도 대외적으로는 번영과 평화를 구가했다. 하지만 문제는 내부로부터 싹트기 시작했다. 17세기 중엽부터 왕권을 둘러싼 패권다툼이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잦은 권력찬탈은 필연적으로 왕권의 약화와 민심의 이반을 초래하였다. 특히 아유타야의 대 캄보디아 영향력은 강력한 베트남의 등장으로 현저히 약화되었고, 버마가 다시 압박을 해오면서 1767년 버마에 의해 아유타야는 드디어 완전히 멸망하고 만다. 33명의 왕이 417년간 통치했던 국가의 종말이었다. 아마도 탁신이라는 태국의 장수가 다시 버마를 태국 땅에서 몰아내는데 성공하지 않았다면, 태국은 역사상에서 영영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아유타야의 옛 도읍인 아유타야 역사공원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 시대의 건축적 특징은 이전 시대에서는 볼 수 없었던 양식인 쁘랑(Prang) 탑의 출현과 뮤랄 페인팅(벽화)의 사용 증가인 바, 비록 버마의 침공으로 도시의 대부분이 파괴되었다고 할지라도, 현존하는 아유타야 역사도시는 태국 민족예술의 발전을 훌륭하게 증언하고 있다는 것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이유이다.

 

왓야이 차이몽콘

'야이'는 크다는 뜻이다.  72m의 높이를 가긴 쩨디 때문에 붙은 이름으로, 줄여 '왓야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본래는 '왓 프라 짜오파야타이'라는 긴 이름을 가졌다고 한다. 1592년 나레쑤언왕이 버마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기념으로 지은 것이라고 한다

  * 참고 : 태국의 탑 종류

           쁘랑 : 크메르 양식으로 옥수수 모양

           쩨디 : 스리랑카 양식의 종 모양(원뿔모양)

 * 재질 및 용도  : 홍토 벽돌에 스투코(벽토)를 바른 형태로 부처님의 유물이나 승려, 혹은 군주의 유골을 봉안하였다고 한다

 

 

 

 

출입문

 

 

섬세한 조각

 

 

 

태국에는 이런 와불이 많다. 열반에 든, 혹은 명상에 잠긴 부처님을 형상화한 것일까? 

아니면, 날씨가 더워서 이곳 사람들은 항상 이런 자세를 하고 있는 것일까?

 

 

이렇게 부처님의 몸에 금박지를 붙인다. 입구나. 불상 앞에서 금박지 종이를 파는 상인들이 있다.

 

 

수많은 불상들이 이렇게 온전한 모습으로 쭉 도열해 있다

 

 

 

 

 

 

 

 

 

 

 

72m의제디. 가파른 계단(천국으로 오르는 길)을 오르면 작은 방이 나오고, 그곳에 조그마한 부처님이 봉안되어 있고, 가운데는 우물처럼 거대한 구멍이 뚫려 있다.

 

 

내부의 모습

 

안에서 밖을 내다본 풍경

 

뒷편의 모습으로 수많은 불상들과 화단이 있다

 

 왓 마하탓

마하탓은 '마하(Maha: 위대한)'와 탓(That: 유물)이 합친 말이다. '왓마하탓'이라는 이름의 절은 대개 그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을 차지하고 있다.

아유타야의 '마하탓'은 약 630여 년 전인 1374년에 보롬마라차 1세(재위 1370-1388)에 의해 아유타야 도성의 중심부에 창건된 사원으로서 아유타야 최대 규모의 사찰이다. 그 중앙에는 50m 높이의 쁘랑 대답이 위치하고 있다. 이른 새벽 명상을 하던 왕이 동남쪽에서 빛을 발하는 부처님의유물을 발견하였으며, 신성한 그 자리에 사원을 짓게 된 것이 창건유래이다.

 앙코르 제국의 유적에서 보는 것처럼 정교한 평면 구성을 기초로 하여, 중앙에 옥수수 모양의쁘랑탑을 세우고 기단부 코너와 주위에 보조탑을 세워 불교의 메루 우주론(수미산, 부처님의 정토)을 표현하는 것이 특징이다.

 부처님의 유물을 보관하고 있음은 물론, 왕실이 후원하는 매우 영향력있는 종단의 종정이 주석하고 있던 곳이었기 때문에 '왓마하탓'은 명실상부하게 아유타야를 대표하는 사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1767년 버마군 침략시 약탈과 방화로 사원의 대부분이 크게 훼손되엇으며, 비교적 좋은 상태였던 중앙의 쁘랑 대탑은 1904년 무너져 내려 지금은 돌무더기 상태로 남아 있다. < 태국문화원 자료>

 

 

 

 

 

                                    통기구

 

 

무너져 가는 탑과 훼손된 불상들

 

 

 

 

 

 

 

 

 

 

 

 

 

 

 

 

 

 

 

 

 

 

 

 

 

 

 

 

 

 

 

프라 몽콘 보핏 

 

'프라 시산 펫'과 이웃한 건물로 '프라 몽콘 보핏'이라는 불상을 봉안하고 있어 유명하다. 나레수안왕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불상으로 송탐왕(1611-1628)에 의해 당초 불상이 있던 자리가 왕실전용 화장장으로 바뀌면서 현재의 자리로 옮겨 봉안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수차례, 파괴 되면서 현재는 원형에 가깝게 복원된 불상이 모셔져 있다. 큰 규모의 불상을 봉안하기 위해 6열의 기둥으로 커다란 지붕을 지지하고 있으며, 그 모습은 마치 거대한 새가 날아오르는 모습을 연상케한다. 정면의 박공부분은 바탕을 붉은 색으로 칠하고, 그 위를 금색 부조로 장식하고 있다.

 

 

 왓 프라 시산펫(Wat Phra Sisanphet)

 왕실 전용사원으로 왕이 곧 사원을 지키는 유일한 승려이자 제사장으로서 부처님의 거주지인 '푸타왓'만 있을 뿐이며 승려가 거주하는 요사채 같은 시설은 없다.

 '보롬트라일로타낫'왕(재위 1448-1488)이 왕궁건물을 지금의 위치로 이전하고 당초 왕궁건물이 있던 자리를 왕실사원터로 봉헌하면서 만들어지게 된 사원이다. 그의 아들이 라마티보디 2세(1491-1529) 때에야 완공되었고, 아버지와 형을 위해 같은 모양의 불탑(쩨디) 두 개를 건축했고, 그 안에 그들의 유골을 봉안하엿다. 동시에 그는 '프라시산펫'이라는 16미터 높이의 금불상(입상)을 주조하여 불당에 봉안하였다. 하지만 이 불상은 1767년 버마군의 침략에 의해 크게 훼손되어 지금은 없다.  그 후 라마티보디 2세 사후 그를 위한 쩨디가 앞의 두개와 같은 모양으로 세워져 오늘 날 보는 세 개의 장엄한 쩨디군이 완성되었다.

 이들의 위풍당당한 모습은 수코타이왕국을 병합하고 란나왕국까지 영향권에 둠으로써 인도차이나의 강자로 부상한 당시의 아유타야의 힘을 상징적으로웅변하는 듯하다.

 역시 1767년 버마 침공으로 대부분의 불당 건물들이 폐허로 변했다.

 

입구

 

라마티보디 2세와 그의 아버지와 형의 유골을 봉안한 쩨디

 

 

 

 

 

 

 

 

 

 

 

 

 

허물어진 불당터의 모습

 

 

 

 

 

 

스투코 장식의 흔적

 

 

 왓 로까이 쑤타람

슬리핑 붓다(열반상).  길이 42m, 높이 5m. 연꽃이 받치고 있으며, 한쪽 팔을 괴고 있는 전형적인 열반상이다. 방콕의 왓포에 있는 붓다의 모델이 되었다고 하나, 알 수 없다. 원래는 불당안에 있었을 것이나. 지금은 모두 없어지고, 붓다만 남아 있다

 

 

 

 

 

 

 

 

 왓 차이 와타나람(Wat Chai Wattanaram)

“왓 차이 와타나람(Wat Chai Wattanaram)”은 아유타야 왕국의 24대 왕인 ‘쁘라삿 통’(Prasart Thong: 재위 1630-1655)왕의 즉위 년도인 1630년도에 만들어진 불교 사찰이다. 이 사원은 아유타야의 도성 바깥쪽에 위치하는 사원으로서 아유타야의 서남쪽을 감싸고 흐르는 짜오프라야 강의 강변에 위치한다.
 
‘왓 차이와타나람’ 사원은 강을 향해 동향 배치되어 있으며, 불상이 모셔져 있던 법당 터와 종 모양의 제디탑, 그리고 사원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쁘랑탑군(모두 13개의 탑) 등의 건축물로 구성되어 있다. 벽돌로 쌓아 올린 이 사원은 정교한 평면도 및 뛰어난 조형미로 인해 아유타야 예술의 극치를 보여주는 건축물로 평가되어 왔다.

 

정 중앙에 위치한 옥수수 모양의 쁘랑탑의 높이는 35미터로서 초기 아유타야 양식을 따르고 있다. 중앙 쁘랑탑은 비교적 높은 정사각형의 기단 위에 설치되어 있으며, 동서남북 네 방향에는 탑의 내부와 연결되는 가파른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기단 위의 네 모서리에는 낮은 높이의 보조 쁘랑탑 네 개가 세워져 있는데 중앙 쁘랑탑과는 다소 다른 형태로서 후기 아유타야 양식으로 분류한다.
 
기단 위에 놓인 중앙 쁘랑 및 보조 쁘랑의 모습은 다른 아유타야 쁘랑탑들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 이 사원을 다른 사원과 달리 보이게 하는 가장 현저한 특징은 바로 쁘랑탑의 주위를 정방형으로 둘러싸고 있는 회랑(갤러리)의 모습이다. 회랑의 네 코너와 그 사이사이 동서남북의 네 방향에는 마치 찌를듯한 모습의 회랑탑이 설치되어 있는데, 이들 회랑탑의 형태는 다른 유적지에서 찾아 볼 수 없는 독특한 모양이다. 탑의 규모도 매우 클 뿐더러 끝이 뾰쪽한 원추 모양이어서 시각적으로 매우 강렬한 인상을 전해준다.

 

왕실의 장례용 임시 건축물인 “프라 메루(Phra Meru)”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으로 추측되는 탑의 모습은 여러모로 크메르의 앙코르왓을 상기시킨다. 실제로 이 사원을 건축한 쁘라삿통왕은 왕위에 오르기 전 크메르 침공을 주도한 바 있으며, 일부에서는 쁘라삿통 왕이 이 때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지은 건축물로 해석하기도 한다. 쁘라삿통 왕은 크메르 건축물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여 앙코르왓에 사람들을 보내 현지를 견학하게 한 후 이를 참고하여 자신의 궁(프라나컨루앙)을 지은 적도 있다.
 
지붕이 사라진 회랑에는 복도를 따라 횡렬로 불상이 안치되어 있는데, 유혹을 제압하는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하고 있다. 모두 120기인 이 불상은 본래 금을 입힌 아름다운 모습이었다고 하나, 현재는 대다수의 불상이 상당히 훼손되어 있는 상태이다. 귀중품을 찾기 위해 머리와 팔 등이 잘려나간 불상의 모습은 역사의 패배자가 지불해야 할 참혹한 대가를 증언해 준다.
 
모두 여덟 개인 회랑탑 내부에는 왕의 모습으로 성장을 한 불상이 봉안되어 있다. 왕의 모습을 한 불상은 우주의 군주로서의 부처를 상징하는 것이다. 이 같은 모습의 불상은 쁘라삿통왕 시대에 널리 유행하였다고 한다. 탑의 천정에는 우주를 형상화한 조각장식이 있었고, 탑의 내부는 벽화가, 탑의 외부에는 부처님의 일대기를 표현한 12개의 벽토 부조가 장식되어 있었다고 하나 대부분 사라진 상태이다.

‘왓 차이와타나람’ 사원에는 이들 쁘랑 탑군(塔群) 이외에도 본존불을 모셨던 불당 건물터(기단부)와 꽤 규모가 큰 제디탑이 남아 있다. 쁘랑 탑군을 등지고 강쪽으로 불당터 앞 좌우측에 한 개씩 설치되어 있는 제디는 스리랑카 양식의 제디탑과 유사한 모습이지만, 네 모서리를 톱니모양으로 만들어 역동적 상승감을 표현하는 아유타야 특유의 제디탑이다.

이 사원을 지은 쁘라삿통왕은 당초 정식 후계자가 아니었으며, 왕위에 오르기 전에는 ‘짜오프라야 시 수리야웡’이라는 이름으로 막강한 실권을 가지고 있으면서, 선대 두 왕을 제거하고 아유타야의 24대 왕위에 올라 27대왕 나라이 왕까지 이어지는 쁘라삿통왕조를 수립한 인물이다. 권력찬탈과정에서 수많은 목숨이 희생되었고, 취약한 정통성으로 인해 그의 재위기간 중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난 바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사원은 아유타야 도성 바깥에 위치한다. 쁘라삿통왕이 즉위하면서 자신의 주거지였던 이곳에 사원을 지어 봉헌한 것이다. 도성 안의 그 어떤 사원도 압도할만한 이렇게 엄청난 규모의 사원을 도성 바깥에 만든 것은 마치 정통성이 없는 신분으로서 왕권을 찬탈한 쁘라삿통왕의 모습을 상징하는 듯하다.  <태국문화원 자료>

 

 

 

 

 스투코에 남은 섬세한 조각의 흔적

 

 

 

 

 

 

 

 

 

 마침 방문한 날 입장이 금지되어 있었다. 지난 여름의 수해로 아직 복구중이기 때문이라 짐작하며, 하는 수 없이 외곽을 따라 한바퀴 쭉 돌아봤다. 옛 폐사지를 강따라 걸어가며, 평화롭고 애잔한 시간이었다. 걸으며 보는 것만으로도 그 규모를 알 수 있었고, 아유타야에서 그 규모가 가장 온전하게 남아 있는 유적으로 보였다. 훼손되긴 했으되, 완전히 파괴되진 않아서, 제 자리에 자기 모습을  보존하고 있는 유적지였다. 그만큼 아름답고, 섬세하고, 웅장했다.

 

 

 수투코(벽토)에 새겨진 섬세한 조각들의 일부로 미루어 이 건축물이 온전했을 당시의 아름다움을 상상해봤다. 고대 건축물들은 이처럼 시간을 초월하여 그 웅장함과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건만, 현대에는 무엇을 만들며 후손에게 전하려 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