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중국(곤명, 여강, 대리, 성도 07.1.1

셋째날(나시족마을, 옥룡설산, 여강)

여름숲2 2008. 8. 9. 20:33

 

*나시족 마을(백사촌)

 나시족은 중국 윈난성 서북부 리쟝을 중심으로, 쓰촨성, 티벳자치구 등에 퍼져 살고 있는 인구 3십여만명의 소수민족이다.

나시족의 중심 도시인 리쟝은 양쯔강의 상류인 진샤강이 도시를 감싸안고 흐르며 인근에는 해발 5,600미터의 만년설산인 옥룡설산이 자리잡고 있다. 리쟝의 구시가는 아름다운 기와집들이 들어차 있고 수백년전의 옛날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나시족은 동파라는 독특한 종교를 신봉한다. 동파는 나시족의 종교이면서 그 종교를 바탕으로 창안된 문명의 이름이기도 하다. 동파교는 티벳 불교의 원류로 알려진 본(Bon)교와 맥이 닿아있는 고대 종교로, 만물에 정령이 있다고 믿는 다신교적 신앙 관념을 그 바탕으로 한다. 나시족에게는 천제를 비롯해 다양한 제사의식이 발달되어 있다.

하늘에 제사지내는 천제와 자연에 깃든 정령을 기리는 자연신 제사는 인간과 자연의 화해를 추구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치러지는 제의라고 할 수 있다.

천제는 1년에 두세번, 특별한 날에 열린다. 이 날이 되면 제사가 열리는 장소에는 양털로 만든 나시족 전통 복장 차림의 주민들이 몰려들어 왁자지껄한 축제의 장을 만든다.

돌로 쌓여진 제단에 향불을 피우고 돼지와 닭을 잡아 피를 뿌리며 앞날의 길흉을 점친다. 또 경전을 불에 태워 하늘로 올리면서 소원을 빌기도 한다. 기원이 끝나면 동파교의 승려들이 동파무라고 불리는 춤을 추며 제천의식을 마무리한다.

나시족은 동파문자라는 고대의 상형문자를 현대에도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세계적으로 큰 주목을 받고 있다.

동파문자는 인류가 사용하는 마지막 상형문자인 셈이다. 이 문자는 동파교의 방대한 경전인 동파경을 기록하기 위해 창안된 것으로, 어떤 학자는 동파문자가 인류의 문자 가운데 가장 역사가 오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나시족은 이 문자를 사용하여 수많은 신화와 전설, 경전을 기록하였다. 동파문으로 기록되어 전해져 내려오는 책은 현재 약 2만권이 남아 있다. 1천여개의 상형문자로 구성된 동파문에 의해 기록된 수많은 두루마리 경전은 나시족의 정치, 경제, 문화, 군사 등 모든 분야를 아우르고 있으며 인간과 자연에 대한 인식과 이해, 철학을 담고 있다.

나시족의 동파교는 중국 공산혁명 직후부터 지속적인 탄압을 받아왔고 문화대혁명 기간 중에 특히 혹심한 박해를 받아서 승려는 물론 그 문화 자체가 송두리째 사라져버릴 위기에 처하기도 했었다.

동파교의 제천의식도 10년 이상이나 맥이 끊어졌다. 특히 나시족 가정마다 조상의 유물로 보관해 내려오던 길이 1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그림, 신로도(神路圖)는 문혁 기간중 거의 자취가 없어지게 되었다. 나시족은 죽은 후 신로도를 밟으며 이승에서 저승으로 영혼이 떠나간다고 믿어 왔다.

중국이 개방화의 길을 걸으면서 윈난성 리쟝 나시족 자치주에서는 잃어버린 동파 문화를 제대로 되살리자는 움직임이 조심스럽게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이미 관광지로 탈바꿈한 리쟝에서 동파문화와 동파문자는 관광 상품으로 먼저 팔려나가고 있다. 동파 문화가 그 옛날의 찬란한 영광을 다시 살려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성에 성벽이 없다’이런 고성(古城)을 본적이 있는가? 운남성에는 유일하게 세계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 있다. 바로 리장 고성이다. 1997년 12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곳은 약 800여년 지난 지금도 옛날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원, 송나라의 건축양식의 영향으로 약간은 한족의 문화를 느낄 수 있지만, 고유한 나시족의 문화를 표현한 독특한 건축양식이 아직도 남아 있는 역사유적지이다. 더우기 이곳은 얼마 전에 한국 TV에서도 절찬리에 방영해 한국인들에게도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차마고도(茶马古道)의 길목으로도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예로부터 중국에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서안(西安)을 출발해서 서역으로 건너가는 중앙실크로드가 있었는가 하면 남방에는 사천성으로부터 시작해 운남의 곤명을 거쳐 대리, 리장, 샹거리라를 넘어 인도로 들어가는 서남실크로드가 있었다. 그 중심 길목에 바로 리장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은 중국인뿐만 아니라 전 세계인들이 한번쯤은 꼭 가보고 싶어 하는 여행지로 떠오르고 있다. 서양인들은 이곳을 가르켜 흔히‘동양의 알프스’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그런데 이 리장에는 여느 고성과는 달리 성벽이 없는 고성이 있다. 당연히 성이라면 성을 보호하기 위해 성벽이 있어야 하는 것이 상식인데, 리장 고성에는 그 어디에서도 성벽을 찾아 볼 수 없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여기에는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13세기 초 북방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던 징기스칸(후에 원나라를 세움)은 당시 중원의 남송(南宋)을 정복하기 위해 우회 전략을 세우게 된다. 정면대결을 피하고 우회적으로 남쪽으로부터 역공격하는 전략이었다. 이 때 몽고족이 처음 들어왔던 곳이 리장 이었다. 이들은 리장을 거쳐 지금의 대리(大理)를 수도로 하고 있었던 당시 대리국(大理國)을 멸망시킨다. 이 사건은 운남성의 수도가 대리에서 지금의 곤명으로 바뀌는 계기가 된다. 이어 이들은 곤명을 거쳐 다시 북상하여 결국 남송을 멸망시키고 원나라(AD1279-1368)를 세우게 된다. 우회전략이 성공했던 것이다. 그런데 당시 몽고족이 리장에 처음 들어올 때 그들을 적극적으로 환영하고 아낌없이 지원을 했던 목(木)씨 성(姓)을 가진 부족이 있었다. 이 인연으로 후에 원나라가 세워지면서 몽고족을 도왔던 목(木)씨 부족은 원나라로부터 나시족을 통치하는 권한을 부여 받게 되었고 지금의 리장 고성을 건축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처음 성을 설계하는 과정에서부터 성벽을 고려하지 않고 설계 했다는 것이다. 이유인즉 자신들의 성(姓)인 한자‘木’(나무‘목’)자에 성벽과 같은 테두리‘口’(입‘구’)자를 결합하면 ‘木’+‘口’=‘困’(궁할‘곤’)의 한자가 된다는 것이다. 한자의‘困’의 의미는 ‘고생하다. 곤경에 처하다. 궁지에 빠지다. [어떤 환경이나 조건의 제약 또는 어려움에 빠져 벗어날 수 없음을 나타냄]’의 뜻을 지니고 있다. 결국 한자의 나쁜 의미를 고려해서 성벽을 쌓지 않았다는 것이다. 중국인들의 사고를 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이야기다.

 

  리장 고성의 또 한가지의 특이한 점은 고성 안에 여러 갈래의 크고 작은 수로(水路)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리장을 가 본 사람은 이 수로를 보면서 참 운치가 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이런 수로가 집집마다 연결 되어 있을까? 고성을 거닐다 보면 우리는 쉽게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이 수로는 나시족의 일상생활과 아주 밀접한 관계로 설계 되어 있다는 것이다. 생활에 편리하도록 집 문을 열면 바로 문 앞에 수로가 있어 거기서 채소를 씻거나 빨래를 하도록 처음부터 고려했다는 이야기다. 생각 할수록 참 지혜로운 민족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도 이 수로에는 물고기가 살고 있을 정도로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다. 이 수로가 있기에 고성이 더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리장에는 주로 나시족(納西族)이 살고 있다. 인구는 약 278,500명이며 그 중 전체 인구의 약 2/3가 리장 고성 안에 거주하고 있다. 이 밖에 사천성 일부와 서장자치주에도 나시족이 살고 있다. 나시족은 고유한 자기 언어를 가지고 있다. 크게 두 방언지역으로 나누는데 운남성과 사천성 경계지역인 루구후(泸沽湖)에 있는 모소인(摩梭人)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약5만명 정도)와, 리장시를 중심으로 사용하고 있는 언어(약25만명 정도)이다. 이 두 방언 사이에는 교류가 적으며 대화의 많은 어려움이 있다. 필자도 나시족 연구를 위해 약 1년동안 나시어를 배운적이 있다. 그런데 지역에 따라 언어차이가 많아 대화하는데 많은 여러움을 겪은 적이 있다.

 

  나시족은 내세울 것이 참 많은 민족이다. 리장 고성이외에도 또 하나의 세계적으로 유명한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는데, 바로 동파문자(东巴文字)이다. 동파문자는 일종의 상형문자로써, 지금은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지 않지만 약 1,300개의 글자모양을 가지고 있으며 12,000권에 이르는 동파경(东巴经)이 기록되어 있다. 동파경은 본래 나시족이 믿는 원시종교인 동파교(东巴教)의 경전이다. 동파교의 발원지는 지금의 운남성 샹거리라 백지촌(云南省香格里拉白地村)일대이며, 우리에게는 ‘바이숴이타이’(白水台)로 잘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만일 白地에 왔다가지 않으면 진정한 동파가 아니다’(没有到过白地,不算真东巴)는 전설이 있을 정도로 동파교의 성지로 알려져 있다. 동파경 안에는 나시족의 철학과 시, 천문학, 풍습, 예술, 의약, 종교제사 등 나시족의 모든 문화와 역사, 그리고 풍습이 담겨져 있어 일종의 ‘백과사전’이라고도 불리기도 한다. 일반사람들은 읽기가 매우 힘들며 동파(东巴-교주)만이 읽어 낼 수 있다. 동파는 지역마다 있으며 대부분 청빈한 농민으로 평상시는 자기노동을 하다가 요청이 있을 때 제사의식을 주관하는 삶을 살고 있다. 요즘 들어와서는 학술적 가치와 더불어 동파나 동파문자가 나시족의 중요한 관광자원의 하나로 상품화되고 있다.

 

  나시족의 복장은 ‘남녀 모두 양가죽을 걸친다’(男女皆披羊皮)는 풍습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본래 유목민족이면서 목축업이 발달했던 것에 기인한 것으로 남자의 경우 점차 한족복장으로 바뀌었지만, 여자의 복장은 아직도 등 뒤에 일종의 ‘요아오’(有袄)라고 불리우는 양피를 어깨에 걸치고 있다. 그리고 그 위에 일곱 개의 원이 붙어 있다. 이는 북두칠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나시족 여인들이 새벽에 별을 보고 일하러 나갔다가 밤늦게 별을 보고 집으로 돌아온다는 여인들의 근면성을 표현하는 일종의 상징이다.

 

  나시족의 결혼제도는 1부1처제이고 남녀혼인은 주로 부모가 결정권을 가지고 있다. 남자의 경우 7,8살 때 부모가 며느리를 물색하지만, 남녀가 20세 이상이 될 때 비로서 정식 결혼을 할 수 있다. 특히 루구후(泸沽湖)에 살고 있는 모소인(摩梭人:나시족의 한 지류로서 모계사회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은 일종의 독특한 결혼풍습을 가지고 있는데 이를 ‘아샤’(阿夏),‘아주’(阿注)라고 부른다. 이 혼인제도의 특징은 남녀 간의 서로를 위한 공동의 가정을 이루지 않는다. 남자는 밤에만 여자 집에 가서 잠을 자고 그 다음날에 아침 일찍 자기 집으로 돌아가 생활하는 형태이다. 그런데 남자가 밤마다 드나드는 문이 항상 열려 있다가도 만일 어느 날 이 문이 닫혀 있으면 절교한다는 의미를 전달하는 것으로 남자는 더 이상 여자를 찾지 않는다. 이러한 혼인제도는 일종의 모계(母系)형태를 근거로 하고 있다. 모계형태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가정에서 연령이 가장 많은 여자가 가장(家长)의 임무를 가지고 있으며, 모든 권한(재산권 포함)도 가지고 있다. 가족구성원은 대부분 외가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고, 한 가정에 일반적으로 2-4대(약 20-30명 정도)가 함께 모여 사는 것이 특징이다.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눈으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얼마 전에 이곳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지금은 관광지로 개방이 되어 옛날의 모습을 점점 잃어버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돌아왔지만, 아직도 모계사회의 형태를 그대로 지켜 나가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한 민족의 역사와 문화는 그 민족을 지켜 나갈 수 있는 큰 힘과 원동력이 된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하는 계기였던 것 같다.(인용)


 

 

운남성 여강 나시족 거주지인 백사촌 입구. 이곳에 명나라 시기 건축물인 '대보적궁''유리전''문창궁'이 있으며, '대보적궁'에 있는 '백사벽화'가 유명하다.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한다. '백사벽화'는 600여년전 한족의 불교, 장족의 라마교, 도교의 불도를 합친 '천수관음도'이다

 

 

 

 

 백사의 악기를 연주하는 노인들

 

 

 

 

 

 동파 문자의 시자벽

 

 백사촌은 여강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로 나시족 최초의 집거지이면서, 여강 목씨토사(세습족장제도)의 발상지라고 한다.

아직 순박하고 때 묻지 않은 고산지대 사람들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지만, 조금씩 밀려드는 상업문화에 곧 순수함을 잃어버릴 듯하다

 

*옥룡설산

 

 일년 내내대 눈이 녹지 않는 설산으로 산 정상에는 늘 안개구름이 서려 있어 멀리서 보면 마치 '옥룡이 하늘로 날아 오르는 모습을 닮았다'하여 '옥룡설산'이란 이름이 붙었다.  13개의 산봉우리가 가로로 배열되어 있으며, 주봉은 해발 5,596m로 아직 처녀봉이다.

 

양쯔강의 상류인 진사장강[金沙江]을 사이에 두고 위룽쉐산과 하바쉐산[哈巴雪山(합파설산):5,396m]이 솟아 있고, 두 산 사이로 강을 따라 ‘호랑이가 건너뛸 만큼 좁다’
라는 뜻의 후탸오샤[虎跳峡] 협곡지역이 길이 16㎞까지 이어진다. 위룽쉐산은 <서유기西遊記>에서 손오공이 갇혀 벌을 받았다는 산으로 전해진다.
해발 3,000m 지점까지 등산로가 나 있고 4,500m까지는 케이블카가 연결되어 있으며 케이블카에서 전망대까지는 원시림 사이로 산책로가 있다.
해발 4,450m 지점에 윈사핑[雲杉坪(운삼평)]이 있는데, 삼나무 원시림으로 둘러싸인 넓은 평야이다. 위룽쉐산은 1년 내내 눈이 녹지 않는 만년설로 덮여 있고 희귀한 식물이 많아 중국의 빙하박물관 또는 식물왕국이라 불린다. 부근에 위룽쉐산의 만년설에서 흘러내린 물이 호수를 이룬 관광명소 헤이룽탄[黑龍潭(흑룡담)] 공원이 있다.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눈부시게 파란 하늘이 펼쳐졌다. 해발 2000m가 넘으면서 조금씩 숨이 가빠진다. 가져온 과자는 부풀어 터지기 일보 직전이다.

 이렇게 귀여운 버스를 타고 산 중턱까지 올라간다

 

 다시 리프트를 타고...

여기에서 산소를 대여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냥 버틸만하다. 사실 성도에서부터 고산지대에 조금씩 적응하면서 온 셈이다.

 

 

 

 

 운삼평- 리프트에서 내려서 해발 4000m까지 걸어서 올라가야 하는데, 나무계단을 하나씩 오를 때마다 숨이 턱에 찬다. 머리도 아프고 힘이 들어서 말을 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맑은 하늘아래 상쾌한 공기와 풍광이 이 모든 고통을 잊게 한다.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풍광 앞에서 말문이 막힌다

하느님의 숨겨둔 정원이 이러하리라!

 

 

리프트에서 내려 운삼평까지 걸어가는 길에 이곳 사람들이 장사를 하고 있다. 여러가지 기념품을 팔거나, 의상을 빌려주고 사진을 찍어준다.

 

 

 

 산 중턱 마을에 사람들이 오래 전부터 터를 잡고 살아 왔음을 보여준다

숨 막히게 아름다운 색깔의 향연이다

 

 

 

 

*여강 고성

 800여년 전 남송 시대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여강 고성은 고성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으며, 여전히 나시족이 살고 있다.대리 고성과 마찬가지고 성벽이 없으며, 진흙과 나무로 만들어진 전통가옥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어 10여년전 대지진 때에도 끄떡없었다고 한다.  미로와 같은 전통 가옥과 버드나무가 각 길마다 어우러져 있고 개천 양옆으로 소수민족들의 카페촌은 밤이면 축제를 연다. 

여강고성 앞 상가 

 

 여강거리의 모택동 상

 

여강 고성 입구

 

 여강 거리 바닥의 섬세한 돌 문양

 

 

여강 어느 집 바닥의 장식

 

 여강의 풍경

  

 여강의 거리- 돌을 깔아 만든 천년의 길을  걷는 것은 행복하다. 서로 붙어 있는 집들 사이의 오밀조밀한 풍경과 그 사이에 흐르는 맑은 수로는 한없이 정겹다. 지금은 관광객들이 많아지면서 마을 전체가 기념품가게로 바뀌고 있지만, 그 가게를 천천히 돌며 몇가지 기념품들을 고르는 재미도 괜찮다. 이미 현대화된 세상에서 옛 것만을 고집할 수 없으니, 이렇게 변해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리라. 다만, 이 아름다운 도시가 마을 주민들의 소득 증대와 옛 마을의 아름다움 사이에서 행복한 타협에 도달하기를 바랄 뿐이다.

 

 

 여강의 골목골목마다 흐르고 있는 이 수로를 예전에는 식수로 사용했다고 하는데, 설산에서 흘러온 물이라고 한다.

 

 지금은 이처럼 아름다운 물고기들에게 그 자리를 내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