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중국(곤명, 여강, 대리, 성도 07.1.1

둘째날(성도)

여름숲2 2008. 8. 9. 20:03

  성도 공항의 하늘은 찌뿌둥했다. 가랑비가 으슬으슬 내리는 음산한 날씨였다. 가이드 말에 따르면 성도는 일년내내 이런 날씨라 한다. 맑고 쾌창한 하늘을 보기 어렵기에 그 매운 사천 요리가 필요했나 보다. 자극적이고 강렬한 맛이 자칫 우울해질 기분을 돌려세울 완화제 역할을 했을 테니까.

 성도의 낮도 해저문 저녁 시간의 쓸쓸함으로 어두컴컴했다. 그래서 재갈량은 유비에게 삼국을 황금분할하여 가장 척박하고 어두운 이곳을  힘이 가장 약했던 촉나라의 땅으로  추천했나 보다.

 

사천성(四川省) 성도(成都)


사천성의 성도(省都)이며, 중국 삼국시대 촉한을 통일한 유비가 수도로 삼았던 성도(成都)는 중국에서도 다양한 먹거리와 볼거리가 많은 지역으로 손꼽히는 서남지방을 대표하는 풍요로운 도시입니다. 특히, 유네스코지정의 세계문화유산인 구채구,황룡,낙산,아미산,티벳자치구 관광지등과 인접하여 내국인은 물론 전세계 여행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중국최대의 관광도시라 할 수 있습니다. 연평균기온은 약16도(1월평균-6도,7월평균-26도)이며, 연강우량은 약967mm입니다.

 

*무후사

 

제갈량(諸葛亮)을 모신 사당, 무후사(武侯祠 : 우호우츠)

무후사는 중국 3세기를 풍미한 유비와 장비 관우 등 촉나라의 여러 명장을 거느린 전설의 전략가, 제갈공명, 그 제갈량을 기리기 위해 서진 영안 원년에 만들어진 사당이다. 무후사의 이름은 제갈량이 죽은 후의 시호인 충무후(忠無候)에서 유래되었다.

경내로 들어가면 유비전과 제갈량전, 촉한의 문·무관 28위의 동상 및 '제갈고(諸葛鼓)'라 칭해지는 북, 동고(銅鼓) 등의 문화재가 보관되어 있다. 유비전은 정문으로 들어가 최초의 건물인데 황금의 유비상이 안치되어 있고 벽에는 공명의 정치·군사상의 전략사항으로 유명한 융중대(隆中對)의 액자가 걸려있다. 관우, 장비 등의 문·무관 28인의 상은 옆 동(棟)에 있고 벽에는 그들의 문장과 업적을 기리는 액자와 연(聯)이 전시되어 있다. 제갈고는 공명이 남쪽을 정벌하면서 만든 것으로 낮에는 그것으로 밥을 짓고 밤에는 경보를 발했다고 한다. 또 무후사 뒤편에는 유비의 묘인 혜릉(惠陵)과 문장, 서법, 석각에 모두 뛰어나 삼절(三絶)로 꼽힌 당비(唐碑)가 있다.

무후사는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삼국시대의 사당으로 여겨지며 1961년 국무원에 의해서 전국 중요 문물 보호단위로 정해졌다. 무후사가 정확하게 언제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략 6세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존재하는 무후사는 청대 강희 11년(1672년)에 옛 터 위에 중건된 것이다.

무후사는 중국 3세기를 풍미한 유비와 장비 관우 등 촉나라의 여러 명장을 거느린 전설의 전략가, 제갈공명, 그 제갈량을 기리기 위해 서진 영안 원년에 만들어진 사당이다. 무후사의 이름은 제갈량이 죽은 후의 시호인 충무후(忠無候)에서 유래되었다.

 경내로 들어가면 유비전과 제갈량전, 촉한의 문·무관 28위의 동상 및 '제갈고(諸葛鼓)'라 칭해지는 북, 동고(銅鼓) 등의 문화재가 보관되어 있다. 유비전은 정문으로 들어가 최초의 건물인데 황금의 유비상이 안치되어 있고 벽에는 공명의 정치·군사상의 전략사항으로 유명한 융중대(隆中對)의 액자가 걸려있다. 관우, 장비 등의 문·무관 28인의 상은 옆 동(棟)에 있고 벽에는 그들의 문장과 업적을 기리는 액자와 연(聯)이 전시되어 있다. 제갈고는 공명이 남쪽을 정벌하면서 만든 것으로 낮에는 그것으로 밥을 짓고 밤에는 경보를 발했다고 한다. 또 무후사 뒤편에는 유비의 묘인 혜릉(惠陵)과 문장, 서법, 석각에 모두 뛰어나 삼절(三絶)로 꼽힌 당비(唐碑)가 있다.

 무후사는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삼국시대의 사당으로 여겨지며 1961년 국무원에 의해서 전국 중요 문물 보호단위로 정해졌다. 무후사가 정확하게 언제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략 6세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존재하는 무후사는 청대 강희 11년(1672년)에 옛 터 위에 중건된 것이다.


◇ 제갈량에 대해...
 낭야군 양도현(琅句郡 陽都縣 : 山東省 沂水縣) 출생으로 자는 공명(孔明),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후한 말, 관직에 오르지 않았을 때도 명성이 높아 와룡선생(臥龍先生)이라 일컬어졌고, 207년 유비(劉備)로부터 초빙되어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진언(進言)하고 군신수어지교(君臣水魚之交)를 맺었다. 이듬해 오(吳)의 손권(孫權)과 연합하여 남하하는 조조를 대파하는 등의 수많은 전공(戰功)을 세워 221년 한(漢)의 멸망을 계기로 유비가 제위에 오르자 재상이 되었다. 유비가 죽은 후에는 어린 후주(後主) 유선(劉禪)을 보필하여 재차 오(吳)와 연합, 위(魏)와 항쟁하였으며 위와 싸우기 위하여 출진할 때 올린 《전출사표(前出師表)》, 《후출사표(後出師表)》는 이것을 읽고 울지 않는 자는 사람이 아니라고까지 일컬어질 정도로 천고(千古)의 명문으로 여겨진다.

 또 제갈량은 유비가 그를 초빙하기 위해 보잘 것 없는 초가에 세번갔다는 삼고초려(三顧草廬)와 "신은 본래 포의로서 몸소 남양에서 밭갈이하며 구차이 어지러운 세상에 목숨을 보존하려 했을 뿐 ... "으로 시작하는 출사표(出師表), 그의 용병, 용인술을 대표하는 읍참마속(泣斬馬謖), 칠종칠금(七縱七擒) 등의 우리에게 친숙한 고사성어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出師表(출사표)

선제(先帝)께서는 창업의 뜻을 반도 이루시기 전에 붕어하시고, 지금 천하는 셋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거기다가 우리 익주(益州)는 싸움으로 피폐해 있으니 이는 실로 나라가 흥하느냐, 망하느냐가 거린 위급한 때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그러하되 폐하를 곁에서 모시는 신하는 안에서 게으르지 않고 충성된 무사는 밖에서 스스로의 몸을 잊음은, 모두가 선제의 남다른 지우를 추모하여 폐하께 이를 보답하려 함인 줄 압니다.


마땅히 폐하의 들으심을 넓게 여시어, 선제께서 끼친 덕을 더욱 빛나게 하시며, 뜻있는 선비들의 의기를 더욱 넓히고 키우셔야 할 것입니다.결코 스스로 덕이 엷고 재주가 모자란다고 함부로 단정하셔셔는 아니되며, 옳지 않은 비유로 의를 잃으심으로써 충성된 간언이 들어오는 길을 막으셔서도 아니됩니다.폐하께서 거처하시는 궁중과 관원들이 정사를 보는 조정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벼슬을 올리는 일과 벌을 내리는 일은 그 착함과 악함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 궁중 다르고 조정 달라서는 아니됩니다.



간사한 죄를 범한 자나 충성되고 착한 일을 한 자는 마땅히 그 일을 맡은 관원에게 넘겨 그 형벌과 상을 결정하게 함으로써 폐하의 공평하고 밝은 다스림을 세상에 뚜렷하게 내비치도록 하십시오.사사로이 한쪽으로 치우쳐 안(궁중)과 밖(조정)의 법이 서로 달라지게 해서는
아니됩니다.시중벼슬 시랑벼슬에 있는 곽유지·비위·동윤은 모두 선량하고 진실되며 뜻과 헤아림이 충성되고 깨끗합니다.선제께서는 그 때문에 그들을 여럿 가운데서 뽑아 쓰시고 폐하께까지 넘겨주신 것입니다.어리석은 생각으로는, 궁중의 일은 일의 크고 작음을 가림없이 그들에게 물어 그대로 따르심이 좋겠습니다. 그들은 빠지거나 새는 일 없도록 폐하를 보필하여 이로움을 넓혀 줄 것입니다.



장군 상총은 그 성품과 행동이 맑고 치우침이 없으며 군사를 부리는 일에도 구석구석 밝습니다. 지난날 선제께서도 그를 써보시고 능력이 있다고 말씀하신 바 있어 여럿과 의논 끝에 그를 도독으로 삼은 것입니다.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군사에 관한 일이면 크고 작음을 가림이 없이 그와 의논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반드시 진중의 군사들을 화목하게 하고 뛰어난 자와 못한 자를 가려 각기 그 있어야 할 곳에 서게 할 것입니다.어질고 밝은 신하를 가까이 하고 소인을 멀리 한 까닭에 전한은 흥성하였고, 소인을 가까이 하고 어진 신하를 머리 한 까닭에 후한은 기울어 졌습니다. 선제께서 살아 계실 때 이 일을 논하다 보면 환제·영제시절의 어지러움을 통탄하고 한스럽게 여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 시중상서 장사 참군 자리에 세 사람은 곧고 발라 절의를 지켜 죽을 만한 신하들입니다. 폐하께서 그들을 가까이 하시고 믿어 주시면 한실이 다시 융성하기를 날을 헤며 기다릴 수 있을 것입니다.신은 본래 아무런 벼슬 못한 평민으로 몸소 남양에서 밭 갈고 있었습니다. 어지러운 세상에서 목숨이나 지키며 지낼 뿐 조금이라도 제 이름이 제후의 귀에 들어가 그들에게 쓰이게 되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선제께서는 신의 낮고 보잘것없음을 꺼리지 않으시고, 귀한 몸을 굽혀 신의 오두막집을 세 번이나 찾으시고 제게 지금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을 물으셨습니다. 이에 감격한 신은 선제를 위해 개나 말처럼 닫고 헤맴을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 뒤 선제의 세력이 엎어지고 뒤집히려 할 때 신은 싸움에 진 군사들 틈에서 소임(싸움에 진 군사를 되살리는)을 맡고 위태롭고 어려운 지경에서 명(그 위태로움과 어려움에서 구해 달라는)을 받았습니다. 그로부터 스물하고도 한 해, 선제께서는 신이 삼가고 성실함을 알아 주시고, 돌아가실 즈음하여 신에게 나라의 큰일을 맡기셨던 것입니다.명을 받은 이래, 아침부터 밤까지 신이 걱정하기는 두렵게도 그 당부를 들어 드리지 못하여 선제의 밝으심을 다치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지난 5월에는 노수를 건너 그 거친 오랑캐 땅 깊이까지 들어갔습니다.



이제 다행히 남방은 이미 평정되었고, 싸움에 쓸 무기며 인마도 넉넉합니다. 마땅히 3군을 격려하고 이끌어 북으로 중원을 정벌해야 합니다. 느린 말과 무딘 칼 같은 재주나마 힘을 다해 간사하고 흉악한 무리를 쳐 없애고 한실을 부흥시켜 옛 서울(장안)로 되돌리겠습니다.이는 신이 선제께 보답하는 길일 뿐만 아니라 폐하께 충성하기 위해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도 합니다. 그 동안 이곳에 남아 나라에 이롭고 해로움을 헤아려 폐하께 충언올리는 것은 곽유지와 비위·동윤의 일이 될 것입니다.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신에게 역적을 치고 나라를 되살리는 일을 맡겨 주시옵소서. 


그리고 신이 만약 제대로 그일을 해내지 못하면 그 죄를 다스리시고 선제의 영전에 알리옵소서. 만일 폐하의 덕을 흥하게 할 충언이 없으면 곽유지와 비위·동윤을 꾸짖어 그 게으름을 밝히옵소서.폐하 또한 착한 길을 자주 의논하시어 스스로 그 길로 드시기를 꾀하소서. 아름다운 말은 살피시어 받아들이시고 선제께서 남기신 가르치심을 마음 깊이 새겨 좇으시옵소서. 신은 받은 은혜에 감격하여 이제 먼길을 떠나거니와, 떠남에 즈음하여 표문을 올리려 하니 눈물이 솟아 더 말할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제갈량의 후출사표(後出師表)


선제께서는 한을 훔친 역적과는 함께 설 수 없고, 왕업은 천하의 한모퉁이를 차지한 것에 만족해 주저앉아 있을 수 없다 여기시어 신에게 역적을 칠 일을 당부하셨습니다. 선제의 밝으심은 신의 재주를 헤아리시어, 신이 역적을 치는 데에 재주는 모자라고 적은 강함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역적을 치지 않으면 도리어 왕업이 망할 것이니 어찌 일어나 치지 않고 앉아서 망하기만을 기다릴 수 있겠습니까? 이에 그 일을 신에게 맡기시고 의심하지 않으셨습니다.



신은 그 같은 선제의 명을 받은 뒤로 잠자리에 누워도 편안하지 않고 음식을 먹어도 입에 달지 아니했습니다.북으로 위를 치려하면 먼저 남쪽을 평정해야 되겠기에 지난 5월에는 노수를 건넜습니다. 거친 땅 깊숙이 들어가 하루 한 끼를 먹으며 애쓴 것은 신이 스스로 아끼지 않아서가 아니었습니다. 왕업을 돌아보고, 성도에서 만족해 앉아 있을 수는 없다고 여겨, 위태로움과 어려움을 무릅쓰고 선제께서 남기신 뜻을 받들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도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게 좋은 계책이 못된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적은 서쪽에서 지쳐 있고 동쪽에서도 힘을 다 쓴 끝입니다. 병법은 적이 수고로운 틈을 타라 했으니 지금이야말로 크게 밀고 나아갈 때입니다. 거기에 관해 삼가 아뢰 보면 아래와 같습니다.고제께서는 그 밝으심이 해나 달과 같고 곁에서 꾀하는 신하는 (그 슬기로음이) 깊은 못과 같았으나, 험한 데를 지나고 다침을 입으시며 위태로움을 겪으신 뒤에야 비로소 평안하게 되시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폐하께서는 고제에 미치지 못하시고 곁에서 꾀하는 신하도 장량이나 진평만 못하시면서도 긴 계책으로 이기고자 하시며 편히 앉으신 채 천하를 평정하고자 하십니다. 이는 바로 신이 얼른 알지 못할 첫번째 일입니다.



유요와 왕랑은 모두 일찍이 큰 고을을 차지하여, 평안함을 의논하고 계책을 말할 때는 성인을 끌어들였으되, 걱정은 배에 가득하고 이런저런 논의는 그 가슴만 꽉 메게 하였을 뿐입니다. 올해도 싸우지 아니하고 이듬해도 싸우러 가기를 망설이다가 마침내는 손권에게 자리에 앉은 채로 강동을 차지하게 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는 바로 신이 풀길없는 일로 생각하는 두번째입니다.



조조는 지모와 계책이 남달리 뛰어나고 군사를 부림에는 손자·오자를 닮았으나, 남양에서 곤궁에 빠지고 오소에서 험한 꼴을 당하며, 기련에서 위태로움을 겪고, 여양에서 쫓기고, 북산에서 지고, 동관에서 죽을 고비를 넘긴 뒤에야 겨우 한때의 평정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신같이 재주없는 사람이 어찌 위태로움을 겪지 않고 천하를 평정하려 들겠습니까? 그게 신이 알지 못할 세번째 일입니다.



조조는 다섯 번 창패를 공격했으나 떨어뜨리지 못했고, 네 번 소호를 건넜으나 공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복을 써보았으나 이복이 오히려 뺏어버렸고, 하후에게 맡겼으나 하후는 패망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선제께서는 매양 조조가 능력 있다고 추키셨으나 오히려 그같은 실패가 있었는데 하물며 신같이 무디고 재주없는 사람이 어떻게 반드시 이기기만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이게 바로 신이 알 수 없는 네번째 일입니다.



신이 한중에 온 지 아직 한 해가 다 차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조운·양군·마옥·염지·정립·백수·유합·동등과 그 아랫장수 일흔 남짓을 잃었습니다. 언제나 맨 앞장이던 빈수·청광이며 산기·무기를 잃은 것도 천 명이 넘는바 이는 모두 수십 년 동안 여러 지방에서 모아들인 인재요 한 고을에서 얻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만약 다시 몇 년이 지난다면 이들 셋 중 둘은 줄어들 것이니 그때는 어떻게 적을 도모하겠습니까? 이것이 신이 알 수 없는 다섯번째 입니다.



지금 백성들은 궁핍하고 군사들은 지쳐 있습니다. 그러나 할 일을 그만둘 수는 없는 것이, (할 일을 그만둘 수 없음은 곧) 멈추어 있으나 움직여 나아가나 수고로움과 물자가 드는 것은 똑같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일찍 적을 도모함만 못합니다. 그런데도 한 고을의 땅에 의지해 적과 긴 싸움을 하려 하시니 이는 신이 알 수 없는 여섯번째 일입니다.



무릇 함부로 잘라 말할 수 없는 게 세상 일입니다. 지난날 선제께서 초 땅에서 (조조와의) 싸움에 지셨을 때 조조는 손뼉을 치며 말하기를 천하는 이미 평정되었다 했습니다. 그러나 뒤에 선제께서는 동으로 오와 손을 잡고 서로 파촉을 얻으신 뒤 군사를 이끌고 북으로 가시어 마침내는 하후연을 목 베게까지 되었던 것입니다. 이는 조조가 계책을 잘못 세워 우리 한이 설 수 있게 해준 것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하되 뒤에 오가 맹약을 어기매 관우는 싸움에 져서 죽고 선제께서는 자귀에서 일을 그르치시어 조비는 다시 천자를 참칭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일이 그러하니 미리 헤아려 살피기란 실로 어렵습니다. 신은 다만 엎드려 몸을 돌보지 않고 죽을 때까지 애쓸 뿐 그 이루고 못 이룸, 이롭고 해로움에 대해서는 미리 내다보는 데 밝지 못합니다.


 

 

 

 

 

 

 

 제갈량의 묘

  

 

 

 

 

 

* 문수원

 

 사천성 대부분 절이 문화혁명 때 파괴된 탓에 문수원은 현재 성도에 남아 있는 유일한 절이라고 할 수 있다. 이곳은 성도시 서북쪽에

 위치한 저명한 불교사원이다.

 이곳의 전신은 당대의 묘원탑원(妙圓塔院)으로 송나라때 신상사(信相寺)로 불리웠던 곳이다. 전쟁중에 불타 없어졌으나, 전설에 따르

 면 이곳에서 청나라때 어떤 사람이 밤에 붉은 빛을 보고 사람을 보내어 알아보니 붉은 기운속에서 문수보살을 보았다고 하여 청대

 강희  삼십육년에 문수원으로 다시 개명 재건하였다.

 문수원의 건축면적은 11,600㎡로, 절입구를 통과하면 천왕전(天王殿), 삼대사전(三大士殿), 대웅전(大雄殿), 설법당(說法堂), 장경누장

 엄숙목(藏經樓庄嚴肅穆)등 전형적인 청대 건축양식을 볼 수가 있다. 특히 삼대사전 안에는 관세음 문수 보현보살등의 불상이 있으며, 

 대웅전 안에는 석가모니의 본존불이 안치되어 있고, 양옆 벽에는 16존자의 상이 있다.

 그 중, 관음대사상(觀音大士像)은 청동으로 만든 것으로 정교함이 돋보이며, 청도 9년에 만들어진 것이라 한다. 또한 광희제가 말한

 공 림의 8가지 볼거리 중 하나로 여겨지는 옥불은 1922년경에 만들어진 것이다. 또 이밖에 문수원에는 300여개의 많은 귀중한 문화재와

 경전이 있는데, 그 중 승려당증의 두개골은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가 있다. 1942년 남경에서 3조각이 발견되어 현재 한조각은 남경에 

 있고 다른 한조각은 서안에 있으며 마지막 한조각은 당증이 출가하게 된곳이 성도이기에 성도 문수원에서 소장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곳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은 문수원의 차실에서 사천의 특유한 차를 마셔볼 수 있는데, 차와 함께 손으로 만든 다기들을

 구경하면서 중국민간의 전통악기인 비파소리를 감상하는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치앤푸허핑타(千佛和平塔, 천불화평탑)

  

 

 

 

 

 

 

 

 *두보초당

 중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시인 중 하나로 “詩聖(시성)"이라 불리는 두보가 성도에 잠시 있을 때 기거하던 곳으로 성도 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평생 정치에 대한 뜻을 두었음에도 그 뜻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던 두보가 759년 겨울, 안사의 난(안녹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이 정권찬탈을 위해 일으켰던 반란)을 피해 현종(玄宗)을 따라 촉으로 피난을 왔을때, 친한 친구 엄무(嚴武)의 도움으로 서쪽 교외의 경치 아름다운 호숫가에 초가집을 짓고 살수 있었다. 피난 이듬 해 봄에 초가집이 완공되자 사람들은 이곳을 성도초당(成都草堂)이라고 불렀다. 또 완화계(浣花溪) 근처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완화초당이라고도 한다. 두보는 이 곳에서 4년여 동안 살았는데, 이 때 지은 시중에서 현재까지 전해지는 시는 240여 수가 넘는다. 대표적으로 복거(卜居), 춘야희우(春夜喜雨), 강촌(江村) 등의 시는 초당에서 지내던 그의 시름없는 한가로운 심경을 읽을 수 있다.

 현재 보존되고 있는 초당은 1500년과 1811년 두 차례의 확장공사로 인해 넓이가 20ha가 조금 넘으며 경내에는 대해(大懈), 시사당(侍史堂), 공부사(工部祠), 사능초당(沙陵草堂)의 석비 등 건축과 다른 많은 문화재가 있다. 정문에 들어서면 시사당과 두보의 소상(塑像)이 있고, 양쪽의 진열실에는 두보의 시집과 연구서 등이 전시되어 있다

 

 

 두보초당

 

 

 

 

 

 

 

 잘 꾸민 아름다운 공원이다. 사실 이곳 성도에 두보는 4년여를 살았는데, 그 때 살았던 집은 이미 없다. 이곳 마저도 두보가 살았던 터라는 증거도 없다. 그러니 중국사람들이 없는 것을 만들어 실제처럼 부풀려 꾸며 놓은 것이다. 아름다운 초당과 정원을 꾸며 놓고 이 근처에서 시를 짓던 두보를 생각하며, 그의 시를 떠올리는 것이 이곳 관광의 처음과 끝이다.

 그러나 문득 없는 것까지 만들어가며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는 중국 사람들이 좀 무섭다. 고구려의 역사도, 유적도 새로 보수하고 만들면서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고, 만리장성까지 새로 만들어 유적으로 포장하는 그들이니, 또 무슨 짓을 할지 생각하면 두려운 일이다.

 

두보의 시는 언제 읽어도 훌륭하다. 이곳 성도 시절이 평생 떠돌아다니던 두보에겐 가장 평화로운 시기였다고 한다. 그때의 풍경이 잘 보이는 시다

 

江村"""- 두보

 

淸江一曲抱村流(청강일곡포촌류)
맑은 강물 한 굽이 마을 안고 흐르는데,
 
長夏江村事事幽(장하강촌사사유)
강촌마을 긴 여름 철 일마다 한가롭네.

 

自去自來堂下燕(자거자래당하연)
제비는 지붕 아래 오며 가며 나르는데,

 

相親相近水中鷗(상친상근수중구)
물 가운데 갈매기 서로 정답게 노니네,

 

老妻畵紙爲碁局(노처화지위기국)
늙은 아내 종이위에 장기판 그리는데,
     
稚子鼓針作釣鉤(치자고침작조구)
어린 아이 바늘 두드려 낚시 고리 만드네.

 

多病所須唯藥物(다병소수유약물)
병든 몸에 얻고자 하는 것 오직 약물뿐이니,

 

微軀此外更何求(미구차외경하구)
조그만 몸이 이 밖에 다시 무엇 구하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