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제주 3주 살이

제주 D2- 4.3 기념관& 해원 씻김굿

여름숲2 2018. 4. 15. 19:26

*4월 15일 일


 아침에 창밖을 바라보니, 간밤에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 빨간 동백꽃이 한무더기 떨어져 있었다. 마음이 짠했다.









  어제 올라오면서 본 4.3 기념관에 가 보기로 한다. 올해가 4.3 항쟁  70 주년이라 기회가 닿으면 방문하고 싶었다. 기념관은 뜻밖에 훌륭했다. 전시 동선을 따라가다 보면 4.3 항쟁이 일어난 이유, 경과, 의미 등을 알게 된다. 특히 어린이에서부터 청소년, 어른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눈높이에 맞게 설치물과 영상을 배치해 이해도를 높였다. 특히 후반부에 강요배의 거대한 그림 앞에 이르게되면 그동안 채곡채곡 쌓아온 감정이 절정에 치닿게 된다. 전시실이 하나의 거대한 오페라처럼 느껴지니, 아마 최근 제주도와 진보세력들의 예술적 역량이 집대성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가슴이 먹먹해져서 전시관 안에 있는 카페에서 차한잔 마시다가 우연히 오늘이 해원굿 마지막 날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것도 지금 시작한다는.





 뒤에 보이는 건물이 전시관.

 앞의 조각상은 ‘비설(飛雪)’. 초토와 작전이 벌어지던 1949년 1월 6일,  변병생( 당시 25세)과 그의 두 살배기 딸은 거친오름 북동쪽 지역에서 피신 도중 희생되었다가 후일 행인에 의해 눈더미 속에서 발견되었다. 4.3의 비극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전시관 내부의 전시물들을 따라가다 보면, 중앙에서 이런 강렬한 그림과 만나게 된다. 강요배 화가의 대형 그림은 '동백꽃 지다' 연작 중 '한라산 자락 사람들'이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전시된 작품은 아니지만, 강요배의 '동백꽃 지다' 그림이다. 순박한 한라산 자락의 핏방울처럼 붉게 떨어지는 동백꽃은 4.3의 상징이 되었다.








 큰 기대없이 보다 지겨우면 나오자며 들어갔는데...2시간 가량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게 되었다. 처음엔 기독교인들은 싫어할텐데..이런 생각도 하고, 박수무당의 발음이 알아듣기 어렵네. 신기하게 모두 제주 방언으로 하네 이런 생각도 했는데, 어느 순간 굿장단 소리가 살려두고, 살려두고, 살려두고...로 들리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살려주고, 살려주고' 를 따라 외우고 있었다. 70년전 행방불명된 원혼들을 불러내고, 원한을 씻어 저승으로 보내는 의식이 깊어감에 따라 원혼들이 굿마당 가득 떠도는 것 같았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급기야 마지막에 유족들이 나오고, 그들의 한을 달래주는 무당의 몸짓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그래. 제주는 이런 곳이었다. 수없이 육지 것들에게 유린 당하고, 짓밢히며 희생됐던...저 아름다운 유채꽃 아래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칼에 찔려 죽고, 총에 맞아 죽었으며, 아름다운 관광지마다 제주 도민들이 뿌린 피가 스며 있는 땅, 그리하여 오늘 아침 내가 보았던, 땅바닥에 떨어진 동백꽂의 붉은 빛은 그들의 핏방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희생자를 보여준다.




추모 제단



마을별 희생자 명단


 4.3 항쟁으로 죽은 이들은 적게는 1만 5천, 많게는 3만으로 추정되는데, 이 숫자는 당시 제주도민의 9분의 1에 해당하는 숫자라고 한다. 그래서 현기영의 순이삼촌도 한마을에서 같은 날에 집집마다 제사가 지내지는 풍경으로 시작하지 않던가?

 제주 여행의 첫 출발을 4.3 항쟁에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추모로부터 시작할 수 있어서 참 다행이었다. 추모는 내가 그들을, 그들의 아픔을 기억하고 있다는 뜻이니, 아름다운 제주에서 나는 그들을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제주살이를 시작할 것이다.


오늘의 숙소는 서귀포 자연휴양림이다. 어제부터 동가숙서가숙 하는 중이다.


* 참고(팜플렛)

 제주 4.3사건은 미군정기에 발생하여 대한민국 건국 이후에 이르기까지 7년여에 걸쳐 지속된, 한국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피해가 극심했던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1945년 해방이후 미군정 당국의 정책실패와 사회문제 등으로 민심이 불안한 상황에서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로 주민 6명이 죽는 사건이 일어났다. 제주도민의 민.관 총파업에 대응해 미군정은 응원경찰과 서청단원을 제주도에 파견하여 테러와 고문을 일삼았다. 결국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는 경찰과 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 단정 반대를 기치로 무장봉기하였고, 5.10 총선거(200개 선거구)에서 제주도 2개 선거구만이 무투표 과반수 미달로 무효처리되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수립된 뒤 정부는 제주도 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군 병력을 등파하여 강력한 진압작전을 펼쳤다.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중산간마을을 초토화시킨 대대적인 강경진압작전이 전개되었다. 제주도 전역에서 무장대에 협조하였단ㄴ 이유로 수많은 주민들이 집단적으로 죽임을 당했다. 1949년 3월 비로소 선무를 원칙으로 한 지압작전이 전개되어 한라산에 피신했던 사람들이 하산하였다. 1949년 5월 10일 재선거가 성공리에 치러졌고, 그해 6월 무장대는 사실상 궤멸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예비검속자와 내륙지방 형무소 재소자 등이 또다시 희생되었다. 결국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되었다. 이로써 1947년 3.1절 발포사건과 1948년 4.3무장봉기로 촉발되었던 제주 4.3사건은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 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2만 5000~3만 명의 주민들이 희생된 가운데 7년 7개월 만에 막을 내리게 되었다.

 세계적인 냉전 상황과 한반도 분단체제의 고착화 과정에서 발발.전개된 제주 4.3사건은 국가공권력에 의한 집단 희생으로 귀결되었고, 이후 반세기를 넘어 진상규명운동의 과정을 거쳐 명예회복을 통한 화해와 상생의 해결 과정을 밟고 있다.


  제주 4.3 평화 공원 조성사업은 제주 4.3사건에 대한 공동체적 보상의 하나로 이루어졌다. 1980년대 말 4.3진상규명운동에 매진하던 민간사회단체 등은 진상규명과 함께 지속적으로 위령사업을 요구했다. 이런 요구에 부응하여 제주도는 1995년 8월 위령공원 조성계획을 발표했으며, 1997년 12월 김대중 대통령의 선거 공약이 되었고, 마침내 2008년 3월 28일 개관하게 된다.




제주 4.3 유적 지도와 희생자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