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웨하스(하성란)

여름숲2 2008. 11. 26. 16:14

 

 강의 백일몽

공장 신축 현판식에 참석한 사람들이 찍은 사진 한장을 통해 여자의 과거의 기억을 거슬러 올라간다. 그날 돌아오는 길에 개에게 손목을 물렸다. 한번 문 손을 절대 놓지 않는 개의 흰창이 많은 눈에 고인 눈물을 기억하는 여자는 훗날 밤길에 자신의 핸드백을 잡아채는 남자의 팔뚝을 물고 놓지 않아 '개같은 년' 소리를 들으며 한쪽 눈과 코가 터져 내려앉고, 윗니 세 대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는다. 여자의 손목에 아직 개의 잇자국이 없는 사진, 여자가 가장 아름다울 때다

 

1984년

7984년 TV에 나온 유리겔라의 지시대로 숟가락을 구부린 적이 있는 그녀는 여상을 졸업하고 별볼일 없는 직장에 경리로 취업하여 10여년을 일한다. 그저 그런 나날 속에 낯선 목소리로 숟가락을 구부리라는 소리를 듣는다. 삶이 누군가 혹은 알 수 없는 것에 의해 결정되거나 움직여지는 것은 아닌지?

 

웨하스로 만든집

 이혼한 뒤 십년만에 귀국해 폐허가 된 동네의 옛집에 돌아온다. 삼십여년 전 시범주택 단지로 조성되어 대한뉴스에 하얀 에이프런을 두르고 허리 높이의 서양식 작업대에 서서 설거지 시범을 보였던 집이었다. 이사오던 날 자매들과 이층 마루를 거닐며 깔깔거리며 흥겨웠지만, 이층에 새 책상이 올라가는 동시에 아래층 천장 중앙에 매달린 샹들리에가 흔들렸던 집이다. 그 후로 자매들은 곧잘 집이 무너지는 꿈을 꾸었고, 그 후로는 계속 내리막길이었다. 이제는 포크레인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집에 돌아와 어린 시절 이웃이었던 S를 만나 그이 오피스텔에서 지내지만, 그의 전처가 두고간 리모컨을 찾으러 오면서 끝이 난다. 끝없이 계속될 일들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여자는 옛집에 돌아와 조금씩 무너져 내리는 집안에 누웠다. 맨처음 이 집에 이사왔을 때 어머니가 마룻장을 밟을 때마다 나는 소리를 들으며 동생이 말했던 ' 과자로 만든 집, 웨하스를 씹을 때 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림자 아이

아이를 잃어버리고 기억력을 상실한 남자는 병원 마당에 묶여 있는 빨간 자전거를 보며 자신의 자전거라고 생각하지만, 아내는 자신이 자전거를 타지 못했다고 한다. 자신의 오른 손에 무언가를 꼭 쥐고 있었던 것만 같은데, 그게 무엇인지 어쩌다 놓쳤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낮과 낮

취리히 출장 중 사고로 사망한 남편의 유해를 수습하러 온 아내는 남편이 머물고 다닌 자취를 찾아다니며 잃어버린 시간을 맞춘다

 

그것은 인생

남자는 여섯 일곱살 무렵 배가 부른 식모누나의 손에 이끌려 집을 나와 낯선 사내에게 팔렸다. 그 후로 장터를 누비며 만병통치약을 팔았다. 사내는 여러 기술 끝에 남자를 세워두고 칼을 던지는 묘기를 부렸는데, 실은 사내의 묘기라기 보다 남자의 미묘한 칼끝 피하기 기술에 가까운 것이었다. 어른이 된 남자는 어느 날 사내의 칼을 피하지 않으므로써 어깨에 칼을 맞았고, 그 길로 사내와 결별하여 서커스 단원이 되었다. 남자는 난쟁이인 엄지장군톰에게 칼을 던지며 전국방방곳곳을 찾아헤맨다. 사내로부터 들은 식모누나가 왔다는 복숭아가 많이 나는 곳을 다 찾아갈 생각이다.

 

임종

아버지의 장례식장에 떠올리는 기억.

아버지는 젊은시절 태풍으로 배가 묶여 섬에 갇혔을 때의 인연으로 생긴 아들 무영을 버리지만 치매에 걸린 다음에야 찾는다. 뒤늦게 만난 무영이의 왼쪽 뺨에는 포물선 모양의 흉터가 있었고 그런 무영의 모습은 나의 기억과 달라서 낯설고 생소하다.  

 

무심결

시인 K씨의 글 '자식을 앞세우고 걸어가는 산택길에서 자꾸만 현기증이 인다. 햇빛마저 서글프다' 라는 글을 읽고 남자는 8년 전 K씨가 살고 있던 개포동의 아파트를 방문했을 때 만났던 초등학교 6학년 딸을 생각한다. 그 딸아이와 함께 뒷산에 있는 절까지 산책을 갔었을 때 절의 영단에서 본 젊은 여자의 사진과 딸아이의 얼굴이 겹쳐졌다. 그 며칠동안 수해가 나던 과거의 기억과 아버지에 대한 기억속에 헤맨다 

 그러나 며칠동안 자신을 괴롭혔던 문장은 장성한 아들과 딸이 앞서 걷고 그 아이들의 뒷모습을 보며 걷는 시인의 모습이었다. 오독인 것이다.

 

단추

가장 친한 친구 H와 남편이 외도를 하자 H의 아이를 데리고 멀리 도망 가 해장국집에서 일하며 아이를 키운다. 어머니가 만들던 돌복의 단추를 집어 삼켰던 기억이 오래도록 이물감으로 남아있다

 

극지호텔

퇴물 여가수는 17년 전 봄의 기억이 담기 해안가 호텔의 버려진 정원을 쓸쓸하게 내려다 보다. 시간은 모래처럼 스러지고 오래된 것들은 조금씩 낡아간다

 

자전소설

고등학교 때 악동들의 이야기를 소설로 써냈는데, 상상해서 썼던 살인의 추억이 실제 일어났던 일이었다는 점에서 각자의 상처와 분노가 버무려진 만남이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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